나는 수능 끝나고 대학교 들어가기까지의 시기를 참 재미없게 보냈다. 스키장도 가고 해외여행도 가며 끝없는 자유를 누릴 줄 알았는데 스키를 같이 탈 친구가 있어야 했고 해외여행을 갈 가족의 여유가 있어야 했다. 이득을 보려면 자원을 미리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몰랐다. 가만히 기다리면 때가 왔다며 세상이 금덩어리를 던져줄 거라고 21살 때까지 믿었다.
우선 수능 끝난 날 엄마랑 싸웠다. 국어 시간이 부족해서 비문학 지문 2개 정도를 못 읽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3등급 확정이었다. 막상 고사장에서는 멘붕하지 않았다. "남들도 불수능이었을 거다. 1등급컷 80점대일 거다."라는 행복회로가 꽤 잘 오버클럭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오버클럭이 수학, 영어를 안정적으로 풀고 1등급을 받는 데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준 것까진 좋았는데, 엄마한테 그 어처구니없는 결함을 공개할 필요까진 없었던 거였다. 가채점표도 못쓸 정도로 시간 없이 풀고 몇개 찍었다는 식으로 '자랑스럽게' 말했다. 불수능이니까 괜찮다는 행복회로의 명제도 잊지 않고 말했다. 엄마는 나를 '타일렀고' 나는 수험생활의 노력을 부정당했다고 느껴 소리 지르며 반항했다. (그게 원래 고3이 가장 지키고 싶어하는 dignity이지 않은가.) 엄마와 나 둘 중 누가 먼저 자신의 행동이 심했다고 떠올리며, 후회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현실을 왜곡해야 될 때와 안될 때를 구분할 줄 몰랐다는 게 중요했다. 머릿속에 이상사회를 그리는 것까진 좋은데, 거기 사는 것처럼 365일 24시간을 행동하면 몽유병 환자가 흐느적거리는 거랑 다를 게 없다. 무알콜로 취해 있다가, 이따금 깨서 말끝마다 후회 거린다. 세상 탓이 아니라 자신 탓을 하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용인되어 자신이 잘 하고 있는 줄 안다.
국어 찍은 게 해프닝이었으면 좋았으련만 '불수능답지 않은' 등급을 정말 받게 생겼고, 대학 결정을 추가합격 시기까지 치밀하게 유보하는 상황에 내몰렸다. "00대 붙었다!"하고 페이스북에 떠벌리고 자신있게 통보하며 나의 은둔을 고소해한 적들에 열등감을 안겨줄 자격을 획득하지 못했다는 얘기다. 참고로 수시는 고려대 논술 포함 다 떨어졌다. 일반고에서 내신 1,2등급대를 받으며 수험생활 했다면 없었을 시나리오였다. 명문고에서 내가 얻은 건 뭘까? 노력 없이 얻어지는 건 없다는 가성비 좋은 깨달음?
등교는 해야 했고 기숙사 출입이 자유로워질 뿐이었다. 1과 2가 비슷한 비율로 섞인 자신의 등급을 보고 씁쓸해하는 같은 방 '유일한' 친구들과 아직 같이 다녔다. 공부할 땐 스트레스 풀러 가던 외식을 일단 마음껏 해봤다. 하지만 쾌락의 그릇은 그런 소박한 행위로 채워지는 게 아니었다. 수능공부 하던 시절과 같은 옷차림으로 수능공부를 하지 않을 뿐이었다. 분명 작년에 꾀죄죄한 트레이닝복으로 급식 줄을 기다리며 내신 영어지문을 외우던 선배놈들이 대학생이 되자마자 갑자기 승천해 포말한 옷차림을 휘날리며 홈커밍의 교정을 시찰하던데 당장 그렇게 되지는 못한다는 사실에 다소 실망했다. 갑자기 생겨난 돈에 당황해 깡통을 도금하는 '적응한 거지' 신세를 면할 방법을 궁리하고 또 궁리했다.
용돈은 달라는 즉시 엄마가 체크카드 통장에 넣어줬으므로 3년 내내 돈 부족한 걱정은 하지 않았다. 마침 집안 경제 호황기기도 했다. 상팔자는 수능 이후에도 지속됐는데 메이플 현질에 쓸 돈을 벌려고 일용직 알바를 몇 번 나간 '건장한' 룸메에게서 자극받아 전단지 알바를 한 번 해봤다. 업장이 다 그렇듯 거적때기같은 사무소에서 추위에 떨며 대기하다가 열심히 사시는 듯한 형아 아저씨 아줌마 등등..이 섞여 봉고차에 타고 세종의 도램마을 아파트단지까지 가서 2만7천보 가량을 걸었다. 테이프도 없이 문고리에 종이를 절묘히 구부려 걸치는 행위를 반복 숙달하였다. 쫄려서 같이 간 안산 사는 다른 룸메는 자기가 발이 빠르다는 걸 계속 자랑하며 정말로 빨리 붙이려 노력했다. 그날 밤 최저임금이 조금 못 되게 7만원을 입금받았다. 꽤 쏠쏠하다고 느껴 내일도 건강이 된다면 지원하기로 했다. 애석하게도 다음날 일어나니 걸을 수가 없어 2층침대 위층에서 보급형 노트북으로 GTA 산안드레아스나 해야 했다.
고3 입장에선 수능 종료와 함께 자신들의 세계가 붕괴했다고 느꼈겠지만 학교는 여전히 돌아가고 있었는지라 후배들이 쓰는 교지에 학급별 자기소개를 4글자로 적어달라고 반장으로부터 요청이 왔다. '이때 아니면 언제 맘놓고 게을러보겠냐'에 입각해 멋들어진 4글자 짓는 일을 언덕 위 기숙사에서 미루고 미루다 마지막날 급하게 교실동으로 내려가 교탁 컴퓨터를 열어보니 임의로 '샤이니'라고 적혀 있었다. 1학년때 샤이니 춤을 춰서 1주일간 인기몰이를 했고 그 뒤론 서로가 암묵적 흑역사로 정의 내린 줄로만 알았는데 반장이 쓰면서도 꺼림칙했을 거라고 마이너스 수익의 공감을 했다.
존경하는 선생 1명은 남겨놓고 가고 싶었는데 아빠뻘의 시골 고학자 느낌 나는 역사 선생이 타겟이었다. 지적 욕구와 잘 처세하고 싶던, 현실로 눈길을 이제 막 돌린 2016년 나의 새로운 바람을 적시적소에 충족해주었다. 수능 끝나고 자원자만 모아서 대학(유교경전) 강독반을 만들 테니 원하는 사람은 들으라는 '충격발언'을 했는데 내가 그걸 들었고 그것 때문에 얼마간 늦잠을 못 잤다. 고2때 역사 교생이 깜짝방문해서 짬뽕밥 먹으러 가기도 했고, 최후엔 근처 '더 오래된' 옆 고등학교 강당에서 '유학을 淸치다...'같은 동양철학 강연를 들으러 가기도 했다. 기묘한 체험이었다. 학교생활에서 약점이 많았던 프로그래밍 괴짜도 수강생이었다. 문이과 통섭을 하려고 했나... 수강생이 나와 그 친구 둘뿐이었다. 내가 늦잠자면 지각이라고 모닝콜도 해주고 덕분에 현미쌀 한 톨만큼 친해졌다. 세월이 흘러 군대에서 걔가 후임으로 들어왔을 땐 나라미 1포대만큼 친해졌다.
다들 굳이 공부를 하겠다면 운전면허 공부를 했는데 지금 따봤자 장롱면허가 될 거라고 현명한 판단을 했고, 대신 어문회 한자 2급 책을 샀다. 그렇다. 나는 대학에 안 가고 유학자가 되기로 한 거였다... 혼자 근처 공공도서관을 찾아내 언덕길을 올라 열람실에서 한자 하나를 10번씩 필사했다. 고립된 명문고에서의 기숙사 3년은 나를 시대감각에서 꽤 많이 격리시켰다. 대학교 1학년때까지 철 지난 유행어를 명백한 사회적 상황에서 쓰게 만들었다. 짱짱맨이라든가. 해가 져서 도서관을 나왔는데 살이 에도록 춥고 급식 주는 시간이 지나 있어서 학교 앞골목 분식 포차에서 안산 룸메랑 딱 한번 같이 온 3000원어치짜리 떡볶이를 혼자 먹는데 처음엔 유학강의 들을 때처럼 기묘했다가, 수능 직전 집으로 외박했어도 그쪽 도서관에서 하루종일 공부하다 끼니 때우러 편의점 미니약과 먹으러 기어나오던 궁벽한 느낌이 곧 떠올라 착잡해졌다. 고생을 견디기 힘들어 기숙사에서의 한자공부는 이틀간만 했다.
고대 논술까지 포함해 그렇게 얼마간 공부자세를 시늉으로라도 유지했다. 사실 그런 시늉하는 자체가 시간낭비였다. 고대 논술의 경위가 어땠는지는 다음 글을 보시라.
대학 경전 강의 마지막에서 두 번째 날 역사 선생에게 내일은 방 친구들이랑 여수 여행 가기로 해서 결석한다고 통보했다. 역사 선생은 "여수 밤바다~"라고 했다. 그 길로 나는 무사히 수능 끝난 추억을 쌓을 수 있었다. 내가 세운 여행 계획은 철두철미했다. 공부 스트레스로 단련한 광기를 한번에 응집할 수 있는 기회가 이번 여수 여행이라고 생각했다. 무난한 여행 계획이 아니라 6명이 가는 여행을 1박2일급 예능프로로 생각하고 '모르는 사람에게 부탁하기'같은 미션을 짰다는 얘기다. 홍어삼합을 막걸리랑 먹다가 부주의한 발언으로 고3 신분임을 들킨 기분 때문에 예능은 못 찍었지만 바다가 보이는 펜션과 오동도에서 사진, 동영상도 많이 찍고 나름 즐겼다. 중간에 체해서 숙소 바닥에 누워 폰으로 영웅본색 시리즈를 봐야 했는데 그건 좀 아쉬웠다. 여수에서 학교로 도로 돌아와 침구와 미리 빼놓고 얼마 안 남은 기초적 짐을 챙겨 여행 복귀일에 맞춰 온 엄마 차를 타고 기숙사를 영구히 퇴사했다. 이후 지금도 글을 쓰는 이 동네에 꽤 오래 머무르며(물론 지금보다는 새발의 피만한 기간이지만) 한국사 시험, 대학교 정시면접과 예정된 희극과 비극들을 준비했다. 룸메들끼리만 돌려볼 목적으로 3년치 사진과 동영상을 종합한 영상도 무비메이커로 만들었는데 지극정성이었다. 내가 뭘 했고, 뭘 하고 있는지 정확히 파악하고 있어야겠다는 결심이 요즘 드는데 1년을 정리하는 영상을 매년 만들까 하는 생각을 한다. 아마 연말에 시간이 철철 흘러넘쳐야 할 것이다.
PS) 글 흐름상 기숙사에서 술 마신 이야기를 못했다. 나에게도 술 까자는 불법행위 제의를 하는 친구가 있어 출세했다고 생각했다. 그 제의한 친구와 학교 근처 교대 앞 '만만한' 편의점에서 참이슬 빨간뚜껑(상남자들이라서) 수 병, 카스 페트병 수 병, 매운 새우깡 포함 과자 수 봉지를 사서 1년간 고생한 3~4명의 룸메이트들과 회후를 가졌다. 숙련된 대학생인 현재 종이컵에 비율 못 맞춘 소맥을 말아 마실 순 없다. 동료들이 하나둘씩 토하고 바닥을 휘젓는 추태를 사감이었던 담임선생께 들키는 순간에도 난 "적당히 먹다 자라"는 말씀을 귓등으로 들어넘기며 의연함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예 알겠습니다 선생님" 곧 속이 미식거림을 느꼈고 화장실에 들어가 변기를 응시하며 토가 나오려 하는지, 들어갔는지 배 상태를 가만히 점검했다. 늦은 밤이고 피곤해서 팔을 변기시트에 잠시 기대어보기도 했다. 다음 순간 술 안 마신 친구가 다급히 문 너머에서 나를 불렀고 4년 넘게 지난 지금까지도 "변기 껴안고 잔 새끼 ㅋㅋ"란 말을 듣는다.
'기록문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생각의 드릴 (0) | 2020.12.26 |
---|---|
꿈 이야기 2 (0) | 2020.12.17 |
도서부원 #3 (마지막) (0) | 2020.11.28 |
니체 명언의 증명 : 나죽못고나강 (0) | 2020.11.21 |
하데스에게 가는 길 (0) | 2020.11.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