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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시썰 #2 : 인문논술에 꼬라박은 3년

머니코드17 2020. 8. 18.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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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신이 딸렸던 나는 수능 역시 잘 볼 자신이 없었다. 따라서 내가 대학을 가는 방법은 1. 입학사정관제(탑골 학종) 2. 논술 두 가지뿐이라고 믿었다. 사실 이것도 쫄려서 4가지 방법(내신, 수능, 입학사정관제, 논술)에 똑같이 에너지를 분배했다. 결론은 고대 논술을 떨어지고 정시로 원하던 대학교에 입학했다. 본 글에서는 논술에 대한 어떤 생각을 적지 않고 그저 논술에 투자했던 시간들을 반추하려 한다.

 

진정성으로 승부하는 입학사정관제와 인문적 소양과 글쓰기 실력을 평가하는 인문논술에서 승리하기 위해 나는 고등학교 3년, 나아가 평생을 '우직한 문장가'로서 살아내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생기부 진로희망란 3줄(3학년까지 있으니까)을 모두 '국어교사'로 통일하는 것은 나에게 무척 중요했다. 무슨 자장면으로 통일도 아니고 ㅋ 만약 내가 생기부 컨설팅을 해 줄 일이 생긴다면 진로탐색은 최대한 다양하게 하라고 할 것이다. 안 그러면 나처럼 뒤늦게 흥미가 생겨버린 분야를 그림의 떡 보듯 쳐다봐야 한다.

 

그럼 '우직한 문장가' 역할을 성공적으로 해내기 위해 필요한 건 무엇이었을까? '책 읽기'를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학교 도서관에 처박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관심 가는 곳의 정보를 흡수하는 '척 했다'. 활자만을 쳐다보고 있기에 나의 관심사는 지극히 범재처럼 여러 곳에 분산되어 있었고(해봤자 인터넷에 떠도는 유머, 팝송, 나만의 곡을 창작하는 상상) 따라서 이동수업 시간에 도서관 책을 끼고 다니는 것까지만이 할 수 있는 최고의 노력이었다. 책을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도서위원 활동은 끝까지 해냈지만 그건 노력의 축에도 들지 않았다. 그저 정해진 시간에 도서관에 들러 노닥거리거나 노닥거리는 척 기웃거리면 되었으므로. 일리네어식 힙합이 틀어지는 교실을 나와 1980년대식 기자재가 놓여진 낡은 도서관에서 시대착오적인 분위기를 즐기면 됐던 거라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렇듯 나는 정보 수용자기보다는 창작에만 에너지가 쏠려 있었다. 이걸 나쁘게 말하면 내실이 없다고도 할 수 있겠다. 밴드캠프에 그게 그거인 얼터너티브 록을 올려놓고 온갖 sns 계정에 예술가라며 호들갑 떠는 미국 동네 뮤지션 같달까. 따라서 나는 문체라도 좋을 필요가 있었다. 이제야 인문논술이라는 주제의 글의 본론을 시작하지만, 학교에 출장 온 시간강사가 낸 첫 논술 숙제를 원고지에 쓸 때 많이 긴장했다. 당시 처음 만난 인문논술 강사에게 이런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을 거다. "당신이 이 학교에서 가르칠, 쓸데없이 성적만 좋고 인성과 내면은 초라하기 그지없으며 꿈은 기껏해야 한은과 5급 공무원뿐인 따분한 경영학과 지망생들 속에 누구보다 반짝이는 인문적 소양을 가진 내가 있다. 주목하라."

 

이런 기대를 유지한 채로 인문논술 강의시간의 70%를 잡아먹는 개인별 첨삭시간을 자습으로 때우며 기다리다, 마침내 내 첨삭차례가 왔다. 강사는 숙제로 써 온 내 글을 즉석에서 보며 첨삭을 시작했다. "~~"같은 망상을 하고 있었던 터라 내 시나리오대로라면 강사는 나의 압도적인 문체에 감탄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없었고 서두&수식어가 멍청하게 길며 결론은 흐리멍텅한 '전형적인 중학생 스타일'의 내 비교대조문을 빨간 펜으로 그어나갔다. 그때부터 강사와 '나의 경쟁자들'을 감탄시키겠다는 의지는 접고 그저 열심히 그 강사의 강의를 3학년 초반까지 들어나갔다.

 

강사는 영재 자녀를 둔 중산층 부모들에게서 시간당 4만원 정도의 pay를 걷어갔고(우리 집은 한시적 중산층이었던 타이밍이었다. 명문고에서 내게 들어간 돈은 내가 평균 이상의 돈을 버는 교사가 되어야 할 이유이다) 강사는 자신이 버는 그 돈을 진정으로 만끽하는 듯했다. 오늘 출석한 수강생이 적다는 이유로 학교 앞 큰길의 베스킨라빈스로 놀러가 같은 반 애들 몇명과 아이스크림을 먹은 추억은 아직도 선명하다. 정보가 너무 없어 아무래도 주작 같은 외국 Ph.D 출신의 강사는 외출 시 꼭 선글라스를 착용했다. 못해도 그 같은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대충 글쟁이, 문과로서의 진로를 잡았고 그건 현재도 유효하다.

 

그 강사는 '인문고전 읽기'를 특히나 강조했다. 논술 답안 속에 '헤겔이 말했듯이~~'하면 다른 고등학생의 글들보다 교수 입장에서 차별점이 생긴다는 이유에서였다. 적절한 양의 인용을 쓰는 게 좋은지는 논술 합격생이 아닌 입장에서 판다하기 뭐하지만 '인문학자'가 지향점이었던 나는 유럽여행을 한바퀴 돌다 오는 그 글 스타일에 깊이 끌렸다. 그래서 그때부터 '요긴하게 써먹을 인문학자 이름을 하나 건지기 위해' 도서관에서 어려운 책을 들입다 파는 시간을 늘렸다. 그냥 자습하다 머리가 노곤할 때처럼 시간이 날 때 도서관에 갔던 것 같다. 미디어실이나 노트북으로 해외 유튜브 영상이나 제목학원 짤들을 뒤적거리는 시간과 비슷한 비율로 도서관에 살았다. 그 결과 '고전은 현대인의 기준에 안 맞다'라는 결론을 얻었다. 끈기의 문제가 아니라 '끝까지 다 읽어놓고도 뭔 소리했는지 모르겠는'지의 문제다. 현대 언어에서 한 단어로 나타낼 수 있는 개념을 고전은 몇 페이지를 할애해 설명한다. 순전히 그 단어가 생겨나기 이전 시대였기 때문에. 게다가 고전을 쓰던 그 시대의 엘리트는 정말 문장을 간결하게 말할 필요가 있었던 직종 출신이 아니었다면 거의가 화려한 수식어리즘에 빠져 있어서 간결한 글을 써야 하는 논술고사 지망생에겐 독이다. 차라리 알쓸신잡을 마인드맵으로 정리해서 딸딸 외우고 다니는 게 나을 정도다. 마키아벨리나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 아우구스티누스 정도가 편안했다.

 

시간이 흐르며 매주 토요일마다 오던 강사의 수강생들이 하나 둘 그만두기 시작했다. 나는 우직히 숙제를 해가며 매주 수강했다. 가끔 내 답안을 첨삭하던 강사가 글이 깔끔하며 좋다고 긍정적 피드백을 주기는 했지만 정말 내가 대학이 원하는 답안을 써나가고 있는지는 처음 첨삭을 받은 1학년부터 3학년이 되어가도록 확신이 서지 않았다. 남자애들보다 훨씬 독종이었던 여자애들이 3학년이 되자마자 전부 빠져나갔다. 빠져나간 그 여자애들과 도서관 사서쌤이 작당을 했는지 마침 사서쌤이 자체 인문논술 전문반을 만든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순전히 지금껏 들어오던 '유료'강의가 '무료'사서쌤 강의의 맛보기 수업만큼의 효용이 있어서 2년 가까이 들어오던 '유료'를 관두고, '무료'로 넘어갔다. 그만둔다고 말하기 위해 찾아간 방과후 쌤의 노트북 속 엑셀에서 나의 인문논술 수강료가 얼마였는지 처음 봤다. 

 

표면상 강의였지 사서쌤과 애들이 다같이 인서울 대학에서 제공한 논술 기출문제를 풀어보는 스터디였다. 정말 스터디 느낌 나도록 서로 피드백해주고(첨삭을 꼭 외부강사 급 전문가가 해줄 필요 없고 퀄이 비슷하다는 걸 그때 알았다. 적어도 그렇다고 느꼈다) 인터넷의 유수 자료에서 논술 팁들도 사서쌤이 긁어와서 납득시켜줬다. 그리고 굳이 원고지에 육필로 안 쓰고 노트북을 자주 썼다. 빨리빨리 진행되는 느낌이 순전히 '1보 전진하고 일주일 기다려야 되며 그마저도 자주 펑크나는' 외부강사 인문논술보다 쾌적했다.

 

나의 인문논술 준비에 결국은 '굳게 믿고 맏겨놓을 존재'가 사라지면서(사서쌤의 인문논술 특별반은 스터디에 가까웠으므로) 논술 대비를 좀 더 능동적으로 할 필요를 느꼈다. 그래봤자 논술 관련 책을 하나 산 것 뿐이다. 자습시간을 쪼개보려 했으나 실패했고 곧 종이쓰레기가 되었다. 3학년 여름쯤엔 정시 엔진이 힘차게 돌아가고 있었고 감히 멈출 수 없었다! '잠재 가치를 높이 사는' 우직한 글쟁이 정체성을 버린 첫번째 해이기도 했다. 아, 다 필요없고 모의고사에서 수학이 효자과목이 된 첫번째 해였지?

 

가을~겨울쯤엔 노트북의 즉각적 피드백 시간이 가고 b4 원고지와 개요 노트를 활용하는 손글씨 연습을 시작했고 고려대학교를 위한 수리논술 인강 같이보기도 진행했다. 무슨 이유였는지 기억이 안 나는데 고려대학교 유닛을 위한 수리논술 기출문제 짜깁기본을 만드는 걸 내가 도맡았다. 아마 그걸 배포하면서 학교 여자애들에게 처음으로 말 건듯(남녀분반이었다).

 

그렇게 수험생활 끝자락까지 논술에 일정량의 시간을 할애했지만 당시 나의 '생기부'가 더 경쟁력 있다고 판단했고 수시 4개 중 고려대학교 1곳만을 논술로 지원했고 나머지는 학생부 종합으로 넣었다. 심지어 SKY보다 논술이 압도적으로 쉬웠던 한양대마저도 '원클릭'을 썼다. 고려대 논술 일정때문에 수능을 치고서도 일주일 가량 휴대폰을 사지 못했다.

 

벌써 인서울의 대학생이 된 듯한 뿌듯한 기분으로 서울 나들이를 나간 고려대 논술 응시날 사범대학 건물 앞에서 학부생이 젤리 나눠주는 이벤트를 하고 있었다. 같이 받은 쪽지에 '합격하면 단톡방 초대를 위해 이 번호로 연락주세요!(학회장 번호)'라고 적혀 있었고 나는 이걸 논술 추가의 추가 추가 합격발표날까지 간직하고 있었다. 여기에만 쓰는 추잡한 얘기지만 매일 아무도 안 보는 곳에서 고려대가 있는 북쪽을 향해 절까지 하며 소원을 빌었다. 내가 인서울할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수단이었으므로. 그런데 난 시험날 인문논술을 압도적으로 잘 쓰려 시간 대부분을 할애하다가 수리논술 일부를 못 풀어놓고 '어차피 문과 전부가 수리논술에 약하므로 수리논술 못 한 건 문제가 안 된다'고 믿고 있던.... '문제가 많은' 응시자였다. 뭐 수십명 뽑는 경영학과쯤이었다면 가망성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잘못된 판단들이 많았던 인문논술 준비기간이었다. 그리고 그런 잘못된 판단들을 내릴 당시엔 나의 판단이 최선의 판단이라고 믿었다. 이를 원천적으로 근절할 방법은 아직 없는 것 같다. 그저 그때의 판단을 최악의 판단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 수없이 뒤치다꺼리를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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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술 보는날 고대 앞에서 엄마아빠 손잡고 먹으러갔던 돈까스 ㅋㅋ 논술손님이 많아서 그랬는지 맛은 처참했다. 고대 가면 매일같이 먹을 맛이겠거니 하면서 맛있게 먹어치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