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달리기가 느리다.
동네 태권도장에서 5년 짬킹으로 2학년~4학년들 위에 군림하는 맛으로 유년을 때우긴 했는데 어차피 발육이 좋았을 뿐이었고, 운동회나 체육시간에 동급생들끼리 하는 50m 달리기는 4인 1조 중 3등이나 겨우 하는 수준이었다.
중학교 2학년 때 싫어하는 남자애가 있었다. 같은 반에 같은 아파트 단지였는데, 나이에 걸맞지 않게 실내화 주머니를 들고 다니는 나의 하굣길에 들러붙어 시덥잖은 말로 귀찮게 하거나 살살 놀렸다. 내 보호본능 발동영역을 상습적으로 침범하는 걔의 장난에 스타크래프트 테란 OST를 핸드폰에 넣어 듣고 다니던 나는 미련한 초식동물처럼 어쩔 줄 몰라했으며 그 애가 악의 조직이 되고 나와 동료들이 소탕하는 소설을 썼다.
걔는 ㅇ씨였고 나도 ㅇ씨여서 출석번호가 가까웠고 체육시간 50m에 둘이 같이 뛴 날이 있었다. 2명 중 승자에게 수행평가 A를 주기로 했다거나 그랬을 거다.
나는 정당한 방법으로 그 애를 찍어누르고 나의 신체적 우수성을 증명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해 출발선 호각이 불리자마자 죽자살자 달렸다. 살면서 가장 절박하게 전력질주한 마지막 순간이었다.
정신없이 뛰어 결승선을 넘고 뒤돌아본 나는 말도 안 되는 광경을 목격했다. 그 애는 한참 뒤에서 가볍게 슬슬 뛰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승패와 기록, 수행평가 점수 따위 신경도 안 쓴다는 듯이. 무력은 기대할 수 없는 하얗고 앙상한 체격으로 나를 이길 생각은 진작부터 계산에 넣지 않고, 적어도 애쓰다 패하는 모습을 남들에게 보여주느니 '애쓰며' 뛰어가는 내 모습이나 "애쓴다.ㅋㅋ"하면서 관망하겠다는 의도였을 거다라는 것까지 생각이 미치니 '나보다 위의 것을 생각하고 있다(지금 말로는 큰그림을 그린다 정도가 되겠지)'라는 교활함에 말로 표현 못할 전율을 느꼈다. 나로서는 절대 할 수 없는 판단이었고 그게 내가 타인의 지적 우수성을 피부로 느낀 첫경험이었다.
그 날 이후 나는 성적을 유지해서 어른들의 기대를 유지하려 눈앞의 점수에 연연하는 한편, 생활의 많은 순간에서 그 임씨처럼 당장의 보상을 희생하는 대신 손 하나 까딱 안한 채 상대의 입장을 침몰시키고 내 체면을 격상시키는 지략을 종종 시도해봤다.
그래봤자 자기 화를 주체 못하고 히스테리 부리는 어른 앞에서 고분고분 순응하고, 옆에서 반항하는 친구까지 붙잡고 말리는 형태였지만.
높은 상대평가 성적이 만들어낸 어른들의 기대가 가을 햇살마냥 따스하게 쏟아지는 물학군에서 온순하게 자란 나는 온유하면 뭐든 나쁠 게 없다는 마인드였다.
곧 그 마인드는 나를 기숙형 명문고에서 내세울 것 하나 없는 비실한 농업국가로 전락시켰다. 온유한 성격에는 우호적 연대를 수시로 강조해 줄 관계의존적 말발과 집단의 보수성에 녹아들 수 있도록 절제된 표현욕구가 수반되어야 한다는 걸 파악 못한,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몽상가적 낭만주의의 공이 컸다. 깨알같고 동글동글한 글씨로 문학동아리 지원서를 빽빽 채우고도 면접에서 "제가 좋아하는 여자애가 있었는데..."라며 억지 공감이나 유도하다가 詩의 言자도 모를 듯한 이과 영재들을 대신해 떨어진 날 나는 세계의 붕괴를 또 한번 체험했다. 무지가 낳은 당연한 결과를 나는 무참히도 괴로워했다. 그리고 내가 내세웠던 온유 자체를 버리겠다고 결심했다. 반항심을 뒤늦게 키웠다는 얘기다. 물론 빈정대는 농담을 쉽게 쏟아내다가 자습 종이 치면 책상으로 돌아가 말없이 공부에 매진하는 정도까지만.
그 결과 나는 온유와 반항이 섞인 혼종 같은 성격이 되었다. 엄마를 비롯해 나와 한번이라도 싸워본 사람들은 "다루기는 쉬운데, 서서히 나를 좀먹는다."고 나를 평가한다. 뒤통수 치고 등쳐먹는 건 사기의 영역이니까 논외로 하고...
100% 온유해서 정말 쓰레기 같은 사람과도 웃으며 당하며 지내는 것은 중학교 때 그 친구를 봐서라도 못하겠고, 100% 반항심으로 성미에 안 차면 다 때려부시고 다니기는 남이 그러는 걸 보면 멋있다 하겠지만 내가 하기는 무섭다. 그러나 국가에 안보가 필요하듯이 타인이 나의 감정 영역을 침해하고 삶을 힘들게 하는 걸 막기 위해서라도 내 성격의 전투력을 확보해놓을 필요가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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