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문학

특별대우

머니코드17 2020. 7. 30.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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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없어진 세간이다

이번에는 보다 밝던 중학교 때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중학시절은 자신감, 용기백배... 뭐 이런 단어들로 요약될 수 있다. 그때 인연뿐이었던 친구는 더 이상 가오가 없는 나를 "가오"라고 부른다. 그땐 가오의 보통 의미가 뭔지 다들 몰랐다. 우스꽝스러운 행동에 추임새 정도로 넣는 단어쯤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이 시절을 절대 자랑스럽게 여기지 않는다.

자신감의 원천은 반에서 1등만 했던 나의 성적이었다. 특정 사람들은 끝도 없이 부러워할 것이다. 일정량은 존재하기 마련인 내 성적을 부러워하는 사람들을 나는 나의 고정 지지층쯤으로 여겼다. 중학교 1학년 1학기, 담임이 띠지를 나눠주며 이번 중간고사 우리 반 1등은... (내 이름)! 할 때 오오오?하는 애, 질투하는 애 등등이 생겨났으며 그날부로 먹이사슬 최하위가 되는 일은 면하게 되었다. 이는 곧 중학교 첫 중간고사 성적이 나오기 전까지는 유력한 최하위 후보들과 자웅을 겨루고 있었단 말이 된다.

 

명백히 양인 신분을 획득한 나에게 가끔 세태에 어두운 일진~중간진들의 괴롭힘이 유독 심했던 날이면, '내가 공부로 너네들 이긴다. 이딴 폭력학교 졸업하고 누가 잘 사나 보자.'하며 복수를 다짐했다. 공부 좀 하는 양아치도 있었으므로 평균 95점 이상 유지, 반 1등 사수는 나름 힘겨운 사투였다. 주로 그리는 만화 배경은 2020년 후반 정도의 근미래, 지금 중학교 다니는 애들이 성인이 되어 나랑 내 친구들은 잘 살고 일진들은 음모에 휘말려 비참하게 이용당하다 죽는 스토리를 공상하는 것만으로도 난 충분히 알찬 중학생활을 보낼 수 있었다. 공상이 최고의 취미던 그때 학생 만화가로 데뷔했어야 하지 않았나.

덩치가 크고 성격이 순해 또래 사냥꾼들의 좋은 먹잇감이었지만 어쨌든 공부를 잘했던 나는 중학교 선생들에겐 중요한 자원이었다. 과목 석차 1등을 하니 역사쌤이 교사 휴게실로 불러 초콜릿을 주며 칭찬 내지는 EBS중심으로 공부해 보라는 조언을 해준 걸 시작으로 교복 주머니에 동기부여의 달다구리들을 넣어 다니는 일이 안정적 성적 기계로 인정받음과 동시에 늘어났다. 성이 '궉'씨인 음악 선생님과는 피아노를 사이로 두고 앉아 길게 남아 있기도 했고(그래봤자 나도 수업 끝나고 남는 거 극도로 싫어하는 중생이었다. 미연시에 빠져본 적이 있었더라면 그런 개인적인 시간이 얼마나 귀중한지 알았을 텐데) 몽쉘 카카오케이크도 주셨다. 집에서 동생에게 뺏기는 게 싫어 손이 닿기 어려운 방 책상 서랍에 몰래 두고 하나씩 까먹었다. 기본맛보다 훨씬 묵직한 바디감에 전율했다. 지금은 아무리 사먹어도 왜 그때 같은 맛이 안 나는지 모르겠다.

시간이 흘러 '공부 좀 하는 양아치'들은 청춘을 발산하느라 나가떨어졌고 전교 순위권에는 진짜 '자원'들만이 남게 되었다. 진로선생의 지시에 따라 에듀팟, 진로 포트폴리오 등을 작성했다. 진로 포트폴리오라는 두꺼운 클리어파일에는 일개 공립학교 국어교사나 되겠다는 하찮은 선언이 최대한 감성적으로, 학부모 감성으로 꾸며져 있고 지금도 안 버려지고 집 베란다에 있다. 그걸 인쇄해주던 엄마나 아빠는 나보고 판검사나 되라며 뜯어말렸어야 했다. 하여간 학교 선생들의 교무실 VIP였던 자원들 중에서도 나만이 '팝'과 '힙합'을 듣고 문예를 즐길 줄 아는 깨어 있는 엔터테이너이며, 다른 공부벌레들은 이 사회의 기계, 외교관 의사 변호사나 되길 원하는 샌님들이라는 그릇된 자아존중감을 보유했으며 카카오스토리를 통해 은근히 내비쳤다. 타인의 내면까지 면밀히 관찰하고 마침내 존중하는 것까지가 자아존중이다.

자칭 깨어있는 영혼을 지닌 교무실 선생님들의 유망주던 나는 아직도 안 떨어진 전교권 성적을 앞으로도 유지해서 다음과 같은 명성을 취득하고 싶었다. '몇년 전에 외고 한명 찔끔 보낸 전적뿐인 똥통중(나의 시각)에서 드디어 전국에서 내로라하는 특목고생 배출!' 이게 정말로 이루어지면 3학년 교무실 선생님들의 헹가래 쯤이 준비되어 있을 줄 알았다. 자기가 뭘 하는지도 모르면서 남의 시선에 좋아 보이는 껍데기만을 얻어내려는 짓은 이 유장한 글과 같은 후회를 낳는다. 1년 반 동안 안 깨지던 다른 반 여자애의 전교 1등을 내가 처음으로 갈아치운 일, 교무실을 들를 때마다 "(내 이름)는 대단한 얘야"식의 칭찬 샤워를 참을 줄 모르고 올라가는 입꼬리로 받아내던 일, 그걸 집에서 저녁밥 먹으며 엄마랑 자랑스럽게 수다 떨던 일... 성공한 공부 농사였고 학교의 제도권이었던 교사들의 지지는 여자친구 한번 못 사귄 나에게 기득권층에 버금가는 자신감을 안겨주었다. 대한민국에 차고 넘치는 전교 1등들, 지금도 스노비즘과 중립주의로 무장하고 서울대 대나무숲에서 논문을 쓰는 20대 인텔리들 대다수의 공통된 경험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마인드가 지금 사범대를 가게 한 원인제공이 아니었나 싶다. '저를 아껴주시던 선생님의 뒤를 따라 저도 선생님이 해주신 특별대우와 제자가 잘되는걸 지켜보는 일을 묵묵히 실천하겠습니다.' 학급인원의 90%가 내 멸균된 수업에 홀딱 빠져 지식을 빨아들이고, 나의 특별대우를 받는 한두 명의 우등생이 유달리 눈을 반짝거리는 광경을 감상하며 이렇게 읊조리는 공상쯤을 했던 거겠지. 그런 껍데기적 명성으로 가장 최적인 직업은 사실 '사자 직업'이 일반적인데, 나는 입시 후반에 쓸데없는 박애주의에 빠져 이것이 될 기회를 걷어찼다.

 '뒤를 따르겠다. 한번 정한 교사의 꿈을 일편단심으로 이어가겠다.'고 약속했고 그건 내 쪽에서만 눈 가리고 한 약속이었다는 것을 꽤 늦게 알았다. 나도 은사님이란 걸 만나보고 싶어서 수업 들으며 괜찮다 싶었던 선생님들을 여럿 찾아가봤다. 모든 게 절박한 나와는 극명하게 다른 가치관 때문에 번번이 뛰쳐나오듯 그 자리를 헤어졌다. 마침 전공과목이 별볼일없는 대학교 첫 성적표가 나왔고, '진정 내가 선생의 자질이 있는가? 난 선생 하면 안되는 놈 아니냐?'컨셉으로 반 년을 더 지내다가 입대했다. 수능을 다시 쳤으면 차라리 뱉은 말에 책임진다는 점에서 남자다웠겠지. 군대에서 각자도생하려고 발버둥치는 남자들, 특히 하사들을 보니 망상이 나았다. 내가 선생의 자질이 없다는 데 아직은 동의한다. 그렇지만 반쯤 억지로 온 교사의 길을 이 악물고 또다시 억지로 끝내보겠다. 난 어차피 '교원양성기관'이라는 세계 표준적 행정단위 밑에서 일정 시간(4년)을 두고 관리되는 예비인력일 뿐, 그땐 최선의 선택이었지만 나중에 가보니 어리석은 선택이 되었을 뿐이고, 이제부터 나는 그 선택을 최악인 게 되지 않도록 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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