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첫 수학 중간고사에서 27점을 맞았다.
그 점수를 맞기까지의 여정은 지금도 진주알을 꿰듯이 서술할 수 있다.
철저히 수능 평군 1.8등급의 관점에서 재판하자면, 내가 중학교를 다니던 곳은 물학군이었다. 그 안에서 반 1등, 전교 십등 안에서 노니 일진부터 학원 선생님들까지 함부로 못하는 배리어(...)는 당연히 씌워졌고 나는 그 달콤함을 느끼며 안전히 중학시절을 마쳤다. 언제나 자신만만한 표정을 짓고 다녔기에 친구들은 아직도 그때를 나의 리즈시절이라고 부른다. 이 글에서 쓰게 될 고등학교 수학 27점을 비롯한 뒷일들로 인해 나는 그 말만 들으면 피가 거꾸로 솟는다.
당시엔 특목고 열풍이 불고 있었고 나는 나름 힘을 써서 전국에서 신입생을 모집하는 명문고에 들어갔다. 입시설명회에서 그 학교 교사가 "학원 선수학습을 안 해도 우수한 교사진들이 잘 지도해주기 때문에 수업 따라가는데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라고 하는 그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선행학습은 나쁜 거'고 공부하기 싫었으니까. 내가 명문고에 합격했음을 알게 된 동네 수학학원 선생은 12월에 <수학의 정석>을 쥐어주었다. 나는 숙제도 하는둥 마는둥 했다. 어차피 기숙사 입소와 함께 끊을 학원, '나쁜 선행학습'은 필요없다고 했으니까. 순진한 16세의 나를 이렇게 대책없이 자연친화적인 교육사상에 찌들게 한 부동의 동자는 누구일까? 전교조?
그때 특목고들이 으레 그랬듯, 입학 예정자들을 기숙사에 미리 불러모아 1월 한달 간 선수학습을 진행했다. 생애 첫 기숙사에 짐을 풀며 선수학습을 수료한 내 모습을 상상했다. '고등학교의 어느 정도 도전적인 수준에 그럴듯하게 적응하고, 기숙사 호실원들과 정서 깊은 곳까지 하나되는 우정을 맺는'... 그런 개꿈. 그것의 정반대 상태로 마지막 날 학교를 뛰쳐나왔다. 단순히 가혹한 조건 때문에 알바 그만두듯이 '못해먹겠네'라고 하며 나왔다기보다는 시골에서 앞집옆집 이웃들에게 사랑받던 꼬마 명랑 니콜라가 엄격한 라틴어 문법학교에 갇히고 압박에 시달리다가 수업은 못 따라가고 향수병에 걸린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자택 우편으로 성적표가 발송되는 성취도 평가에서 나는 복소수 문제를 모두 찍고 있었다. 엄마는 "한 달 동안 대체 뭐했니? 놀기만 했니?"하며 안방에서 성적표를 들이댔고 지금의 내가 그 자리에 앉아있었다면 "아니 그 쌤들 선행학습 필요없다면서 존나 못 가르치던데(사실이었다) 나보고 어쩌라고요??"라고 항변은 했을 거다. 고개 숙이고 눈물을 삼키는 대신. 눈물은 참말로 미숙(未熟)의 상징이다.
입학까지는 2달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당시 학업 상태가 명문고에서 수업 받기에 메롱인 것은 확실히 인지했으므로, 뭔가 급진적인 행동을 취해야 했다. 동네 일반계고에서 내신등수 사수 후 수시합격으로 전략을 수정, 과감히 명문고에서 탈락할 역량이 미숙자에게 있었겠는가. '언젠가 성적, 교우관계 면에서 상황이 나아지겠지'라 판단했겠지만 당시 정말 그렇게 생각했는지도 의심스럽다. 그저 아무 대책도 취하지 않고 2월에 중학교 졸업반으로 돌아와 <익숙한 교실, 익숙한 책걸상, 익숙한 친구들>곁에서 못다 만든 추억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우기 바빴다. 동네 애들은 못 가는 빡센 고등학교를 체험하고 온 '특별한 친구'역할을 하는 것까지만이 내가 감당 가능한 역할이었다.
강당 뒤편엔 기숙사에서 윽박지르던 선배놈들을 세워두고 강당 앞편엔 교장에게 거수경례를 붙이며 입학은 했다. 수학 역량을 끌어올릴 마지막 시간은 중간고사까지 한 달 가량이었다. 빠르면 중학교 저학년때부터 굴지의 심화학원에서 '키워진'경우가 대부분인 영재들에게 몇 년간 수준이 맞춰진 명문고의 1학년 담당 교사들이 내는 내신문제를 나는 전혀 풀 수가 없었다. 입시설명회와 말이 달랐고 나는 교사진들의 친절한 지도를 받지 못해 <개념원리>예제도 버벅댔다. 자랑스러운 수학 27점을 맞았고 국어나 한국지리 등 다른 과목들도 50점은 넘기면 다행인 수준이었다. 충격은 안 받은 척했고 겨우 무리를 형성한 옆자리 '착한'친구의 비슷한 성적이나 웃으며 구경할 뿐이었다. 그땐 내가 안 느꼈다고 선언하면 안 느낀 게 된다고 믿던 시절이었다. 적어도 내가 루소의 에밀처럼 자연을 만끽하며 자랐었다면 '나 자신의 본능'만은 잘 알았을 것이고 헤매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고통을 마주하면 저항도 도망도 못 하고 속으로 삭이며 '시간이 모두다 해결해줄꺼야.'류의 말이나 주문처럼 외웠을 것을 생각하니 다시 한번 그 따위로 버려진 황금 같은 청소년기가 아까워 부아가 치민다.
수준 높은 수학 수업이 너무도 벅차던 나에게 희소식이 들려온다. 학습부진아를 위한 맞춤형 수업을 진행하는 <도움반>이 있다는 것이다. 나는 그곳에 너무도 가고 싶었다. '애들이 다 알고 있을거라 믿고 중얼거리는' 수학 선생에게서 도망쳐 나온 후 수업의 난이도가 낮으면 더 많이 알아듣게 되고, 고난도 부분은 나의 끈기 있는 자율학습으로 커버해서 결과적으로는 自己 주도 학습을 실현하여 성적 상승을 꾀하기로 했다. 당시엔 학력증진상도 주곤 했으니 나의 의욕은 겉으로라도 불타올랐다. 그 겉으로라는 건 엄마나 친구 앞에서 지나가는 선언 식으로 외치는 구호쯤이었겠지만. 학습 플래너에나 느낌표랑 같이 대문짝만하게 적히는 그런 구호. 여기까지 엄청난 남 탓 하는 글 같겠지만 내 생각엔 나와 남(포괄적으론 교육시스템) 둘 다 크게 잘못했던 것 같다. 가장 큰 '내 탓'은 '본능을 아는 자연인'이 되지 못한 것, 한심한 시스템에 온 운명을 맡겨버린 것쯤이겠지.
기말까지의 성적으로 도움반을 선발하는지 그때까지 우정반으로 불리지 않았다. 그 중간에 모의고사나 수행평가 같은 걸 어느 정도 못 봐서 복도로 불려가 수학샘께 우정반 제의를 받고 온 급우들은 하나같이 치욕스럽다는 반응이었다. "일반반에서 버텨보겠다"고 하고 나왔다고들 했다. 수학 수업 전 쉬는시간에 책과 필통을 들고 도움반 특별실로 자리를 옮겨야 하는 자존심 스크래치를 우려했을 것이다. 자존심이라는 남성성은 저 멀리 달아난 초식동물이 된 나는 머리는 비상하고 부모님한테 학습 기자재와 로고플레이하는 츄리닝을 비롯한 지원은 넘치도록 받지만 인성은 그저 그런 '엘리트'의 자제들이 찧어 대는 자극적인 입방아를 듣지 않으려 노력했고 도움반의 특별실은 그런 나를 안전히 지켜줄 공간이라고 믿었다. 다시 말해 시궁창인 현실을 외면한 공상세계를 하나 더 만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하나 더'라는 건, 현실이 내 맘대로 움직여주지 않을 때 어린 내가 으레 취하는 행동이 공상이었고 그럴 때만큼은 잠시나마 마음이 안식을 찾았기 때문이었다.
기말고사 성적이 완벽히 발표되고 변변치 않은 성적상승을 성공적으로 보인 나는 마침내 위풍당당하게 도움반으로 걸어들어갔다. 그 명문고에서도 이런저런 특징으로 '별나다'고 인식되던 서너 명이 특별실에 얌전히 앉아 있었다.
수학부진아인 나에게 맞춤형 수업을 해주실 선생님은 전형적인 '늙고, 느린' 선생님이었다. 농도 짙은 충청도 말씨+한자어를 말할 때 진짜 한자를 외듯 음절 하나씩 늘여서 부르고(구결도 붙였다)+말끝마다 "이~말이야~!"를 붙이는 어르신의 수업은 수업시간 50분 내내 3문제는 칠판에서 풀어볼까 말까였다. 나는 곧 그 수업시간에의 '자습'을 비롯해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도움반에서의 수업을 거부했고 2학기 중간고사에서 '쎈 B단계빨로' 운좋게 60점대를 맞은 후 일반반 수학교사의 도움반 재제의에 '노'라고 답하여 다음 기회에 나는 도움반을 빠르게 벗어났다.
이후 나는 신승범 인강을 듣기 시작했고, 3년간 그의 커리큘럼을 착실히 따라가기만 하여 수능 수학을 2개 틀리고 1등급을 받았다. 3학년부터 내신이 평균점에 오르고 모의고사 날마다 수학이 효자과목 노릇을 시작하던 날부터 내가 행복해졌는지도 모른다.
이상이 고등학교 1학년을 위한 수학 부진아반 '도움반'에 짧게나마 몸담은 기록이다. 도움반에 가기까지의 진주알 같은 준비과정이 세상을 처음 알게 된 15~16세 때 자급자족형 교육을 사랑하기 시작한 이후 수 개월이라는 게 흠이지만... 더는 살면서 이렇게 정성껏 준비되는 하찮은 기억이 잘 없을 것이다. 명문고에서의 3년은 내가 어린 시절을 보내며 지켜온 소중한 가치들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리는 유별난 시간이었기 때문에, 이따금씩 시간을 들여 추억해보면 아주 재미있다. 이러한 이유로 남들은 좋은 추억쯤으로 생각하는 명문고에서의 일들은 기록문학을 쓰면서 여러 번 소재로 삼게 될 것이다. 내가 재미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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