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28

난 은사가 없다

12년간 은사라고 할만한 사람은 못 만났다. 불행이 아니다. 대부분의 국민이 대충 가르쳐지고 졸업했을 거다. 선생이 잘못했거나 내가 잘못했거나. 늘 둘중 한명이 잘 못해서 인연들은 이어지지 못했다. 시대가 잘못이라고 본다. 선생의 대부분은 느긋한 대가리꽃밭 사상을 강요했고 애들 대부분은 교사가 자기에게 관심 갖는걸 극도로 싫어했다. 내 입시관을 평온한 안빈낙도 교육자의 길로 인도한 분을 어찌저찌 입대 직전까지 만난 날, 노무현과 민중의소리에 열광하는 대깨문임을 알았을 때 수치심에 잠식되었다. 군대에서 기계공들, 하사들을 보며 왜 진작 저쪽 직렬에서 한없이 쿨하게 주어진 삶을 살아내지 못하게 됐을까...를 여러 번 연발했다. 그 결과, 세상이 점지해준 공직자의 길을 기왕 갈거면 말단 실무자에 머물지 말고 ..

기록문학 2021.08.23

나는 범재다

'좋아서 하는 일이 세상에 그렇게 많지 않다.' 나는 이 말을 지지한다. 내 처지랑 참 똑같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언어를 다루는 법에 관한 철학을 목놓아 설파하면 제자들이 개조되어 교문 밖으로 달려나가 세상을 바꿔놓을 거라는 십대 때의 허황된 착각과 적당량의 불운으로 인해 성공적으로 국어교육과에 안착했다. 한번 내 착각이 착각이었다는 걸 감지하자마자 내가 80년대 시설의 캠퍼스에서 미세먼지를 들이마시고 있을 이유는 빠르게 감소했고 '시집' '소득의 많고 적음과 상관없이 아이들을 온몸 던져 돌봐야 한다' ' 생성음운론' 같은 어젠다들을 붙드는 힘도 같이 약해졌다(생성음운론은 지난 학기 유격훈련으로 붙들 수 있게 됐다). 그런 인문주의적 덩어리들이 빠져나간 손안과 머리안은 보다 실용적인 생각들로 채워졌다. ..

기록문학 2021.04.02

라이프스타일의 주도권

몸빼 재질의 바지와 일부러 오버로 산 후리스를 실내복으로 항상 입는다. 스타일을 구기지 않으면서도(당장 줌을 키고 강의를 들어도 문제없을 정도) 이만큼 편한 옷이 없다. 그전까진 2009년부터 입던 다 쭈그러든 후드티, 허리 고무줄이 과하게 짱짱해 허리에 항상 자국이 남는 추리닝을 착용했다. 후드티가 잠옷으로 불리한 게 머리 안 감은 날 편리한 후드는 누울 땐 그저 목 뒤에 뭉쳐진 천 쪼가리이기 때문이다. 집업으로 입고 벗기 편하며 뒤에 모자 없는 후리스가 가장 낫다. 군대에서 터득한 지식이다. 허리 고무줄은 아마 학창시절 사진 속의 내 얼굴이 달덩이였던 이유가 혈액순환에 문제를 겪었기 때문이 아닐까... 잠은 또 어떻게 잤는가? 지쳐 쓰러질 떄까지 비생산적인 공상을 반복했다. 가뜩이나 운동 따위 하지 ..

기록문학 2021.02.20

24학점

기분이 착잡하다. 오는 학기가 예상보다 무척 바빠질 듯하기 때문이다. 한 학기에 24학점만큼은 피하려 했다. 아니 다시는 그럴 일이 없을 줄 알았다. 자유학점을 36학점이나 채워야 한다는 걸 오늘까지 몰랐다. 그건 안 채워도 무방한 줄로만 어제까지 믿고 있었다. 이만큼 듣는 건 3학년 2학기까지 이어질 듯하다. 복수전공급 수강지옥이다. 팔자에도 없던 교양독일어를 장바구니에 넣는다. 기회가 되면 동기들이랑 듣기로, '관대한' 자유학점으로서의 쉬는시간으로 치려던 교양영어회화가 필사적 신청 1순위과목이 되어버린다. 나머지 2학점짜리는 사운드스케이프를 들으려다가 안들으려던 교육사회학을 넣어 차라리 교육학 공부나 더 해놓기로 했다. 이로써 나는 한번 더 '잘못 알고 있었다'. 나 혼자만 관련된 일에 일벌백계는 없..

대학생활&공부 2021.01.29

스트레스를 구분하라

딱히 들을 사람이 있는 게 아니라 내 자신에게 하는 말이다. 위에서 아마겟돈처럼 스트레스가 내려온다. 학회장이 되겠다고 한 건 내 임고 수험생활의 난이도를 두 단계쯤 높여놓았다. 낮에 물리적으로, 정신적으로 그쪽 일에 정신을 뺏겼다는 사실이 열불나서, 저녁 샤워 물줄기에 머리를 문대며 다 씻고 '이 시간대 안 하던' 공부를 들입다 해야겠다는 결단을 내렸고 이행한 후 쓰는 글이다. 공부를 하면서 생각해보니 내 기분 전체를 지배하는 이 스트레스를 제공하는 원인은 지배역의 극히 일부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스트레스라고 인식하는 것의 문자열이 ASVYBPOQZ라면 정작 내 하루 기분 자체를 좃같게 하는 원인은 중간에 숨어있는 B쯤이라는 거다. 나머지 문자들은 B로 인해 쑥대밭이 된 감정이 쉽게 다루어버릴 ..

기록문학 2021.01.29

은근히 천대받는 나

2020년을 돌아보니, 아군도 많이 만들었지만 나를 언짢게 생각하는 적군도 그에 상응하거나 더 많이 만든 것 같다. 주로 여자가 그렇다. 구체적으로 어디에서 만들어졌는지는 여기서 굳이 밝히지 않겠지만, 내가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지 않으면 적이 되는 경향이 강했다. 이 사실에서 또 한 가지 사실을 배울 수 있다. 어중간하게 행동하면 신변만 위험해지고 걱정거리만 생겨날 뿐이다. (사람이 어떻게 모든 집단에서 장군감으로 행동하겠는가. 적당히 관망하며 빠져야 유리할 때도 있는 법이다. 성공했다고 평가되는 외교도 결국은 적국을 일부 만든다. 모든 이와 친구가 될 순 없다. 기왕 적을 만들었다면 그 적에게서 배울 점이나 찾자.)

기록문학 2021.01.22

진중해지기 어려운 이유

고등학교 때 기술 선생은 정말 대충대충 가르치는 스타일이었다. 시장에서 흔히 보이는 소박한 옷매무새로 시장에서 할법한 말을 내뱉으며 "아유.. 이런 걸 왜 가르쳐야 하는지 몰라....!" 수업 하고픈 마음이 없어 보이는 상태였다. 인간상의 데이터가 어느 정도 수집된 지금이야 웃으며 넘기고, 시험범위 알려줄 때만 기다리며 같이 놀았겠지만 그렇지 못했던 17세의 마음엔 '인간실격'을 정의하는 마음의 불이 당겨졌다. 나는, 교사라 함은, 모름지기 진중하게 교과서를 읽어주되 이따금씩 학생의 마음에 비수를 두는 만물형상의 진리를 품은 말을 던져주어야만 한다고 믿었다. 그리고, 거기서 더 진화한 교수라 함은, 강연자리에서 늘상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학문의 심연을 하루종일 휘저어야만 함이라고... 그만 알아보자. ..

기록문학 2021.01.14

동기들 임고 작살난것 같다

윗학번 선배들 초수 대박났다더라. 나도 되겠지? 하고 관성 위로프트하는 즐거운 시간을 보낸 지 딱 1년만. 참고로 나는 군대를 먼저 갔다와서 2년 후에나 임고를 본다. 3년 동안 sns로 아무런 양심 가책도 없이 훔쳐보는 게 익숙해질 정도로 안물안궁 고학번 일거수일투족을 올리던 핵인싸 동기도, 1학년때부터 비슷한 궤적의 문필활동을 하며 전공에 있어 나같은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경륜을 펼치던 동기도(아마 그는 내적 문제로 무너진 탓이 컸을 것이다. 4년 내내 성해보이는 학년이 없었다) 프사를 많은 의미가 함축된 걸로 바꾼다던가 sns유난을 계속 부린다던가 저마다의 방법으로 재수를 받아들이고 있다. 삼수해서 내 경쟁자가 된다면 참 싫을 것이다. 나와 지역을 달리 쓰길 빌어야지. 학과장 교수는 "자신들과 같은 ..

기록문학 2021.01.02

어릴적의 환상-약속에도 유통기한이 있다

어릴적 어른들은 여러가지 환상을 주입해주었고 나는 한술 더 떠서 좀더 큰 후에도 그 환상이 이루어질거라 믿었다. 태권도 3단까지는 아무나 따는거고 4단까지 따면 남들이 쉽게 못 건드린다든가, 고전독서 동아리에 들어가면 근사한 발표회와 가능성 있는 만남이 기다리고 있다든가, 고등학생 때 소수 친구팸이랑 붙어다니기 바빠 수학여행에서 제대로 못 즐긴 에버랜드는 사실 무한한 쾌락의 장소라든가. 시간이 흘러 억지로 억지로 그 약속을 피상적으로 지켜나갔고 에버랜드는 졸업 후 남정네들끼리 3번씩이나 갔지만 남는 건 보상 없는 외상과 "겨우 해치웠네"라는 해방감이었다. 허탈이라는 톱밥이 50%이상 섞인. 왜 나 자신과의 약속들을 지켰는데도 공허를 못 채우는지, 약속들에게서 공통점을 찾아봤다. 다 어릴적 환상에 기반한 ..

기록문학 2020.12.27

생각의 드릴

생각의 드릴을 갖고 그걸로 상황을 뚫을 줄 알아야 한다. 무슨 말이냐고? 나같은 발산적 사고를 하는 놈은 흔히 말해 뒷심이 부족하다. 세상을 지배하는 수많은 방법이 떠오르지만 어느것 하나에도 그걸 행동에 옮길 계획을 취해본 적이 없어 늙어가도록 더벅머리로 방구석에서 신세한탄이나 하게 된다. A라는 계획이 아이디어 형태로 떠올랐다고 치자. 성숙하지 못한 발상가는 그걸 그냥 썩혀놓는다. 기껏 브레인스토밍한 종이를 "자. 수고했다."하면서 구겨 쓰레기통에 던져넣는 거라고 보면 된다. 하지만 그렇게 될 상황에서 A에 관한 생각을 멈추고 싶은 (귀차니즘이라는) 욕구를 억제하고, 고통스럽더라도 그걸 실제 세계로 가져올 방법, 계획, 손써놔야 하는 것들 따위의 리스트를 작성하고, 그 리스트 중에 하나만이라도 훨씬 더..

기록문학 2020.1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