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문학 10

난 은사가 없다

12년간 은사라고 할만한 사람은 못 만났다. 불행이 아니다. 대부분의 국민이 대충 가르쳐지고 졸업했을 거다. 선생이 잘못했거나 내가 잘못했거나. 늘 둘중 한명이 잘 못해서 인연들은 이어지지 못했다. 시대가 잘못이라고 본다. 선생의 대부분은 느긋한 대가리꽃밭 사상을 강요했고 애들 대부분은 교사가 자기에게 관심 갖는걸 극도로 싫어했다. 내 입시관을 평온한 안빈낙도 교육자의 길로 인도한 분을 어찌저찌 입대 직전까지 만난 날, 노무현과 민중의소리에 열광하는 대깨문임을 알았을 때 수치심에 잠식되었다. 군대에서 기계공들, 하사들을 보며 왜 진작 저쪽 직렬에서 한없이 쿨하게 주어진 삶을 살아내지 못하게 됐을까...를 여러 번 연발했다. 그 결과, 세상이 점지해준 공직자의 길을 기왕 갈거면 말단 실무자에 머물지 말고 ..

기록문학 2021.08.23

나는 범재다

'좋아서 하는 일이 세상에 그렇게 많지 않다.' 나는 이 말을 지지한다. 내 처지랑 참 똑같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언어를 다루는 법에 관한 철학을 목놓아 설파하면 제자들이 개조되어 교문 밖으로 달려나가 세상을 바꿔놓을 거라는 십대 때의 허황된 착각과 적당량의 불운으로 인해 성공적으로 국어교육과에 안착했다. 한번 내 착각이 착각이었다는 걸 감지하자마자 내가 80년대 시설의 캠퍼스에서 미세먼지를 들이마시고 있을 이유는 빠르게 감소했고 '시집' '소득의 많고 적음과 상관없이 아이들을 온몸 던져 돌봐야 한다' ' 생성음운론' 같은 어젠다들을 붙드는 힘도 같이 약해졌다(생성음운론은 지난 학기 유격훈련으로 붙들 수 있게 됐다). 그런 인문주의적 덩어리들이 빠져나간 손안과 머리안은 보다 실용적인 생각들로 채워졌다. ..

기록문학 2021.04.02

즐거운 반추 : 왜 그토록 패배주의였을까?

왜 어릴적의 나는 그토록 패배주의였을까? 세상이 너무 내 입맛과는 반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닌텐도를 못 하게 하고 공부와 학원을 보내는 엄마 수업시간에 그림을 못 그리게 하는 학교 입만 열면 "대박, 대박"거리는 2000년대 중후반 날라리들 눈 둘 곳을 모르겠는 '진보적 복장'의 아이돌과 오글거리는 드라마 주 관심사는 현실 타개, 강한 멘탈 형성에 별 도움이 안되는 SF, 판타지 발달단계적 결함 중1때까지 삶의 많은 문제를 '어른 앞에서 울기'로 해결했음 : 난 언제부터 1년에 한 번도 울지 않게 되었는가? 예비고1때 한번 집에서 큰 소리로 울고 난 후 형용할 수 없는 쪽팔림을 느꼈다. 그 후 지금까지 모든 문제를 불평과 욕 또는 행동으로 해결하고 있다. 전략적이지 못한 책임감과 가치관 세상이 이리 잘못..

기록문학 2021.02.21

라이프스타일의 주도권

몸빼 재질의 바지와 일부러 오버로 산 후리스를 실내복으로 항상 입는다. 스타일을 구기지 않으면서도(당장 줌을 키고 강의를 들어도 문제없을 정도) 이만큼 편한 옷이 없다. 그전까진 2009년부터 입던 다 쭈그러든 후드티, 허리 고무줄이 과하게 짱짱해 허리에 항상 자국이 남는 추리닝을 착용했다. 후드티가 잠옷으로 불리한 게 머리 안 감은 날 편리한 후드는 누울 땐 그저 목 뒤에 뭉쳐진 천 쪼가리이기 때문이다. 집업으로 입고 벗기 편하며 뒤에 모자 없는 후리스가 가장 낫다. 군대에서 터득한 지식이다. 허리 고무줄은 아마 학창시절 사진 속의 내 얼굴이 달덩이였던 이유가 혈액순환에 문제를 겪었기 때문이 아닐까... 잠은 또 어떻게 잤는가? 지쳐 쓰러질 떄까지 비생산적인 공상을 반복했다. 가뜩이나 운동 따위 하지 ..

기록문학 2021.02.20

스트레스를 구분하라

딱히 들을 사람이 있는 게 아니라 내 자신에게 하는 말이다. 위에서 아마겟돈처럼 스트레스가 내려온다. 학회장이 되겠다고 한 건 내 임고 수험생활의 난이도를 두 단계쯤 높여놓았다. 낮에 물리적으로, 정신적으로 그쪽 일에 정신을 뺏겼다는 사실이 열불나서, 저녁 샤워 물줄기에 머리를 문대며 다 씻고 '이 시간대 안 하던' 공부를 들입다 해야겠다는 결단을 내렸고 이행한 후 쓰는 글이다. 공부를 하면서 생각해보니 내 기분 전체를 지배하는 이 스트레스를 제공하는 원인은 지배역의 극히 일부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스트레스라고 인식하는 것의 문자열이 ASVYBPOQZ라면 정작 내 하루 기분 자체를 좃같게 하는 원인은 중간에 숨어있는 B쯤이라는 거다. 나머지 문자들은 B로 인해 쑥대밭이 된 감정이 쉽게 다루어버릴 ..

기록문학 2021.01.29

은근히 천대받는 나

2020년을 돌아보니, 아군도 많이 만들었지만 나를 언짢게 생각하는 적군도 그에 상응하거나 더 많이 만든 것 같다. 주로 여자가 그렇다. 구체적으로 어디에서 만들어졌는지는 여기서 굳이 밝히지 않겠지만, 내가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지 않으면 적이 되는 경향이 강했다. 이 사실에서 또 한 가지 사실을 배울 수 있다. 어중간하게 행동하면 신변만 위험해지고 걱정거리만 생겨날 뿐이다. (사람이 어떻게 모든 집단에서 장군감으로 행동하겠는가. 적당히 관망하며 빠져야 유리할 때도 있는 법이다. 성공했다고 평가되는 외교도 결국은 적국을 일부 만든다. 모든 이와 친구가 될 순 없다. 기왕 적을 만들었다면 그 적에게서 배울 점이나 찾자.)

기록문학 2021.01.22

생각의 드릴

생각의 드릴을 갖고 그걸로 상황을 뚫을 줄 알아야 한다. 무슨 말이냐고? 나같은 발산적 사고를 하는 놈은 흔히 말해 뒷심이 부족하다. 세상을 지배하는 수많은 방법이 떠오르지만 어느것 하나에도 그걸 행동에 옮길 계획을 취해본 적이 없어 늙어가도록 더벅머리로 방구석에서 신세한탄이나 하게 된다. A라는 계획이 아이디어 형태로 떠올랐다고 치자. 성숙하지 못한 발상가는 그걸 그냥 썩혀놓는다. 기껏 브레인스토밍한 종이를 "자. 수고했다."하면서 구겨 쓰레기통에 던져넣는 거라고 보면 된다. 하지만 그렇게 될 상황에서 A에 관한 생각을 멈추고 싶은 (귀차니즘이라는) 욕구를 억제하고, 고통스럽더라도 그걸 실제 세계로 가져올 방법, 계획, 손써놔야 하는 것들 따위의 리스트를 작성하고, 그 리스트 중에 하나만이라도 훨씬 더..

기록문학 2020.12.26

수능 끝나고 한 일

나는 수능 끝나고 대학교 들어가기까지의 시기를 참 재미없게 보냈다. 스키장도 가고 해외여행도 가며 끝없는 자유를 누릴 줄 알았는데 스키를 같이 탈 친구가 있어야 했고 해외여행을 갈 가족의 여유가 있어야 했다. 이득을 보려면 자원을 미리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몰랐다. 가만히 기다리면 때가 왔다며 세상이 금덩어리를 던져줄 거라고 21살 때까지 믿었다. 우선 수능 끝난 날 엄마랑 싸웠다. 국어 시간이 부족해서 비문학 지문 2개 정도를 못 읽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3등급 확정이었다. 막상 고사장에서는 멘붕하지 않았다. "남들도 불수능이었을 거다. 1등급컷 80점대일 거다."라는 행복회로가 꽤 잘 오버클럭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오버클럭이 수학, 영어를 안정적으로 풀고 1등급을 받는 데 직간접적으로 영..

기록문학 2020.12.13

니체 명언의 증명 : 나죽못고나강

블로그가 말라죽었던 이유를 다음 문장으로 일축하겠다. '강의 듣고 정리글 올리는 게 사치스러울 정도로 여러가지 일을 벌려놓고 수습했기 때문' 이거 끝낼라치면 저기 톡방에서 짹짹대는 일의 무한반복이었다. 사랑과 감정, 서로에게 희망을 주는 주제로 대화를 나눌 사람은 손에 꼽는 주제에 일적 사람과 카톡방만 수십인 외로운 사업가의 기분이 느껴졌다. 11월 초 스트레스를 견디기 힘들었다. 아무데서나 짜증이 솟구쳤다. 그래서 코로나 한적한 곳으로 살짝 바람을 쐬고 왔다. 경치들(심지어 건물들까지도)이 짜증을 털어버리는 데 상당히 도움이 되었다. 작년 락페를 갔다온 직후가 그러했듯 얼마간은 실제 짜증나는 일이 있어도 편안한 기분을 유지할 수 있었다. '실제 짜증나는 일이 있어도'=일의 쓰나미가 다시 몰아닥쳤다는 얘..

기록문학 2020.11.21

휴가 레퍼토리

휴가 나갈 놈은 알아서 6시까지 부대 나갈 준비를 마쳐놓으라니! 기본적인 알람시계 정도는 제공해야 마땅치 않은가? 라고 내면의 무한복지주의자였던 이병인 나는 생각했다. 전자 손목시계의 희미한 알람소리조차 못 들을까봐 뜬눈으로 휴가 전날 밤을 지새웠다. 이 상태는 스톱워치 구입을 까먹은 말년까지 지속되어 3시간마다 잠에서 깨 시각을 확인하는 생체리듬을 대강 가지게 되었다. 첫 휴가날 새벽은 4시에 침대에서 일어났던 걸로 기억한다. 그때 옆에서 자던 상병(!)이 "...너무 일찍 일어나는 거 아냐?"하고 속삭였다. 소름.... 공군에 있으면서 대략 20번의 휴가를 나왔다. 길이는 2박 3일부터 7박 8일까지 다양했지만 아직 사회 진출이랄 게 없는 스물한~스물두 살이었기 때문에 다이내믹한 일 없이 비슷비슷하게..

기록문학 2020.07.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