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서 하는 일이 세상에 그렇게 많지 않다.' 나는 이 말을 지지한다. 내 처지랑 참 똑같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언어를 다루는 법에 관한 철학을 목놓아 설파하면 제자들이 개조되어 교문 밖으로 달려나가 세상을 바꿔놓을 거라는 십대 때의 허황된 착각과 적당량의 불운으로 인해 성공적으로 국어교육과에 안착했다. 한번 내 착각이 착각이었다는 걸 감지하자마자 내가 80년대 시설의 캠퍼스에서 미세먼지를 들이마시고 있을 이유는 빠르게 감소했고 '시집' '소득의 많고 적음과 상관없이 아이들을 온몸 던져 돌봐야 한다' ' 생성음운론' 같은 어젠다들을 붙드는 힘도 같이 약해졌다(생성음운론은 지난 학기 유격훈련으로 붙들 수 있게 됐다). 그런 인문주의적 덩어리들이 빠져나간 손안과 머리안은 보다 실용적인 생각들로 채워졌다.
지금은 실용주의의 근본 없음과 인문주의의 뜬구름 잡음을 모두 인정하고, 두 쪽 각각의 찬양할 건 찬양하고 까내릴 건 까내리면서 모종의 타협에 이르렀다. 이 상태가 나쁘지 않지만 강의시간에 교수의 사랑을 받고 진정한 국어선생이 되는 것은 꿈도 꾸지 말아야 한다. 과제나 발표에서 짜낸다고 짜낸 국어 관련 아이디어는 세계의 구성요소를 자음과 모음, 그리고 정신으로 여기는 '국어에 진심인 자'들의 밑을 웃돈다. 물품 조달병으로서 단련한 비즈니스적 거래는 학생회 임원 업무를 효율적으로 처리하는 데는 도움이 되지만 45~50분 동안 교실을 허용적, 치유적 가상공간으로 옮겨놓는 데는 악영향만 미친다. 또한, 나의 이런 '국어 외적인 부분'에서의 쓸모를 가장 가까이 포진한 국어인들은 알아보지 못하는 듯하다. 전산오류로 잘못 입학했는데 펜대와 잉크가 좋아서 짱박고 있는 공장 생산직쯤으로 나를 보지 않을까? 옷 입는 것도 그 비슷하게 입고 다니긴 한다.
결론은 별거 없다. 기쁘나 싫으나 나는 순전히 돌아가기엔 너무 늦었기 때문에 지식노동자가 되어야 하고, 출근하고 퇴근만 30번 했는데 200만원 상당의 돈을 통장에 입금받기 위해 지금보다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임용고시에 투여해야 한다. 기숙사에서의 1학기는 불편사항이 여러가지라 뭔가 대단한 걸 하나 만들어서 돌아가야 할 듯한데, 인생 중 가장 빠르게 한달이 지나갔다. 3월은 공부에 필요한 여러 가지 시스템들을 만들어보고, 하나씩 시험해보는 데 다 썼다. 그리고 다리 부상으로 다시 돌아간 '쉽게 지치는 몸'을 '안 쉬어도 많은 걸 해내는 몸'으로 되돌리는 데에도 시간이 들어갔다.
리마인더를 보면 올해가 아닌 3월엔 별난 것들이 참 많이 시작되었었다. 새내기 때의 무한히 허용적인 인간관계의 장이라던가, '수료휴가' 때라던가. 세상의 다양한 모습을 직접 가서 보고 듣는 건 분명 유의미한 일이다. 근데 항상 거기서 끝나왔고, 잊어버리는 순간 난 진화적 무의식으로 체화한 것만 드문드문 남은(체육 수행평가 때의 오래달리기 등)-다시말해 별볼일없는 상태로 돌아갔다. 140학점은 국어교육적인 걸 체화하기엔 적을 뿐더러 대학강의 특성상 비효율적인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진 보는 선에서 끝났다면, 이제부턴 내가 뭘 봤는지, 뭘 했는지, 뭘 가지고 있는지 끝없이 곱씹고 내 걸로 만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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