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말세다. 뇌과학적 법칙인지 우연의 일치인지 나이를 한살씩 먹을수록 세상에 맘에 안 드는 일이 너무 많다. 누구든지 조금만 sns 입소문 타서 유명해지면 앞다투어 자기랑 무관한 음료수 화장품 광고나 하려 하고 그보다도 순진한 후배들은 너무나도 쉽게 sns에 휘발성 감회들을 썼다 지운다. 순전히 그걸 하려고 맡는 일은 중학생 수준의 카드뉴스 쪼가리 만들기. 한창 대한민국 보수화되던 시절 누가누가 더 역사와 사상에 유식하나 대회 나가대던 고딩때의 나와 내 친구들이 현실의 인기를 모으는 데 하등 쓸모없는 짓을 하던 미친놈처럼 여겨진다. 실제로 그때의 내 친구들은 또래문화에서 분리되다시피 한 삶을 산다. 나만이 표면적 인싸가 될 수밖에 없는 직책을 맡았지만 자리에서 오는 책무를 독주처럼 힘겹게 마셔댈 뿐이다.
10대 땐 불편사항들을 그저 참으며 내 할일을 했다. 불편사항의 개수, 내 할일의 난이도. 어느 쪽이 참아줄 만했던 걸까? 하여튼 '장인은 도구를 탓하지 않는다' 마인드로 일관했다. 그렇게 여름에 에어컨 없이 의젓했던 성과가 좋았는지 나빴는지, 큼직한 기억들이 사라져 없다. 아마 성인 때 하는거랑은 비교도 안되게 하찮은 일거리였으리라. 대학생 시청 알바마저 이성 지역청년과 사랑에 빠질 위험이 있다.
지역청년과 연애야말로 20대인 내가 참 하고 싶은 일이다. 그럴 수만 있다면 대외활동의 최고봉, 틀딱들이 쥐고 있는 당의 청년위원장 따위는 아무래도 필요없다. 무엇보다도 지역청년과의 연애는 근거리 연애다. 여기가 광역시라도 버스 좀 타면 만날 수 있는 거 아닌가. 청년의 열정은 연애에나 쏟아야 한다. 에어컨이 나오고 적절한 전자장비가 있는 차(특히 디지털 계기판), 조수석에 타 나와 당일치기 여행을 즐길 어여쁜 과즙상의 여자친구가 있는 여름을 앙망한다. 내 차가 아반떼면 최소한 돈 때문에 만나는 여자는 아니겠지.
내 손에서 기가 막힌 칵테일이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요즘 진을 구해 먹고 싶던 진토닉을 만들고 있는데 약품 맛만 나고 영 시원찮다. 레몬즙을 따로 구해서 더 뿌려야 하나. 잘 말고 못 마는 차이가 어디서 나오는지 모르겠다. 그럴 땐 변수를 세심하게 둬야지. 진병을 냉동보관하고 왔다. 학습을 위해 맛있다고 느꼈던 진토닉을 주는 아도니스 바에 가고 싶다. 초대하고 싶은 동성친구의 대기열은 꽤 찼으나 친구와 나, 늘 어느 한쪽이 안 내킬 뿐이다. 땡기는 음식점조차 가지 못하는 이 문제, 지역청년 여친이면 다 해결될 일인데.
여름을 좋아한다고 봄가을겨울에 동네방네 떠벌리고 다녔는데, 에어컨 없으면 아무 활동을 못 하겠는 아포칼립스상황을 겪고 있다. 유난히 올해가 덥긴 하다. 작년에도, 무려 군대에 있던 재작년에도 이렇게 행동을 제한당하진 않았다. 차라리 탁 트인 밖을 돌아다니면 자연풍이 좀 도와줄 것이다. 하지만 2021년의 나에게는 그럴 수 있는 사유가 아무데에도 없다. 교외 별장에서 보낼 시간이 있는 어른도 근처 뒷산으로 꽤 빠르게 나를 데려다 줄 자전거도 나에겐 없다. 내게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줄 사물이 대체 뭐가 있단 말인가? 마시기 힘들고 몸에는 해롭고 풍미는 모르겠는 싸구려 양주만을 겨우 집 앞 마트에서 획득했을 뿐이다.
오히려 잘 된 일일수도 있다. 내게 지역청년 여친이라도 있었다면 고통을 느끼는 순간 쪼르르 달려가 안겨 '해우(解憂)'를 하고 정작 문제는 당장 얻은 마음의 평화에 취해 방치했을 것이다. 얼마나 많은 세상의 사람들이 옆의 여자 때문에 평생의 멍청한 선택을 하고 살아가는지 안다. 당장의 역겨운 감정은 하룻밤뿐인 술로 지워버리고, 아침이 오자마자 내 할일을 다시 붙들고 가는 게 맞아 보인다. 그게 결과적으로 옳은 행동을 남기고 타인이 봤을 때 높이 평가할 인생을 사는 일 같다. 그래도 지역청년 여친은 나의 20대에 있었으면 좋겠다. 중고차를 타고 이리저리 박으며 다니는 '용서의 시기'에 20대의 그녀쯤이야 남들은 가득가득 넣고 다니고도 멀쩡히 30대 이후를 시작하지 않는가. 그리고 대부분 그 뒤부터 잘못된 선택으로 여생이 판결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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