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적 어른들은 여러가지 환상을 주입해주었고 나는 한술 더 떠서 좀더 큰 후에도 그 환상이 이루어질거라 믿었다.
태권도 3단까지는 아무나 따는거고 4단까지 따면 남들이 쉽게 못 건드린다든가, 고전독서 동아리에 들어가면 근사한 발표회와 가능성 있는 만남이 기다리고 있다든가, 고등학생 때 소수 친구팸이랑 붙어다니기 바빠 수학여행에서 제대로 못 즐긴 에버랜드는 사실 무한한 쾌락의 장소라든가.
시간이 흘러 억지로 억지로 그 약속을 피상적으로 지켜나갔고 에버랜드는 졸업 후 남정네들끼리 3번씩이나 갔지만 남는 건 보상 없는 외상과 "겨우 해치웠네"라는 해방감이었다. 허탈이라는 톱밥이 50%이상 섞인.
왜 나 자신과의 약속들을 지켰는데도 공허를 못 채우는지, 약속들에게서 공통점을 찾아봤다. 다 어릴적 환상에 기반한 해묵은 약속들이라는 것.
어릴적 환상은 수지타산을 계산하는 어른의 입장에서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된다.
과거에 해놓고 묵혀둔 약속이 있다면 그 약속을 어떤 상태에서 했는지부터 기억하자. 감정에 휩쓸려 흐느적거리던 '어린' 상태로 그 시절을 기억한다면 그 약속도 술김에 내지는 sns 뒤적거리다가 맛집글 보고 했을 확률이 높다. 더구나 그때 한 약속을 지키기에는 세상이 너무 변해버렸을지 모른다. 지키지 못할 약속은 하지 말고, 오래된 약속은 지킬 생각부터 하지 말고 현재도 유효한가라는 생각부터 하자. 이게 약속에 관해 정해 놓은 나의 몇 안되는 원칙이다.
약속에도 유통기한이 있다라고 귀여운 제목이 붙어 있지만, 잘 한 약속은 와인처럼 유구하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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