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문학

주기율표 깜지 (울이말글 판본보다 좋은 수정본)

머니코드17 2020. 8. 8. 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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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때, 3년간 우리 학년을 따라다니며 가르치신 과학 선생이 있었다. 그만큼 진정으로 제자가 잘 되길 바라시는 훌륭한 스승님이었고, 일진들도 감히 어쩌지 못하는 카리스마까지 겸비한 분이셨다. 나의 교사 롤모델이기도 했다. 그는 학생들이 주기율표만은 제대로 외우고 졸업하길 원했고 그래서 시행한 조치가 '주기율표 깜지'였다.

사진에 나온 양식을 5장 베끼어 매주 검사를 받았다. 숙제를 안 해올 시, 20cm 자로 손바닥 5대 맞기라는 '신사적인' 체벌이 가해졌다. 의외로 아팠다. 이 2학년 내내 가는 귀찮은 숙제를 영원히 면제받으려면 숙제 검사 대신 자리에서 일어나 주기율표를 암송하면 됐다. 물론 암송을 틀리면 깜지를 안 해왔을 때와 같은 젠틀한 체벌을 받았다.

급우들은 처음엔 다들 고통스러워하며 깜지를 해왔고, 안 해왔다. 용감한 친구들 몇몇은 '안 되겠지만 비벼보자.'는 심리로 준비되지 않은 암송에 도전했고, 대부분 실패하여 손바닥을 점화시켰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어쨌든 암송 통과자가 조금씩 늘어갔고, 매주 과학선생님이 깜지들을 검사하는 시간도 대폭 짧아졌다. 그 중에 종업식 날까지 주기율표 깜지를 100%해오던 미련한 기계가 있었으니, 나였다.

30명이 보는 앞에서 학습부진으로 체벌을 받는 것은 나의 모범생 타이틀에 금을 내는 수치라고 여겼다. 아마 그 선생님도 '성적은 최고지만, 도전정신은 없는 애'정도로 나를 평가했을 것이다. 소심했던 나는 잃을 게 많았다. 당시 내 중학교 지역은 물학군이었는데, 그곳의 평이한 고등학교를 갔다면 나의 새가슴은 비교적 안전했을 것이다. 그런데 일이 좀 꼬인 게 전국에서 학생들을 모아 기숙시키는 소위 명문고를 가 버렸다. 삭발 문화, 선배 군기, 선행학습을 전제한 수업 따위로 한창 음울한 감옥 생활을 만끽하는데 그 중에도 '나대는' 애들이 있었다. 그들은 공부 안 해도 성적 잘 나오는 애들이었고 모든 과목에서 나보다 한참 천재였다. 다만 그들은 자신의 뛰어난 성적을 자신들의 제1강점으로 삼지 않고, 고등학교 입학 전부터 가져온 축구나 랩 같은 자신들의 또 다른 특기에만 골몰하고 있었다. 반면 나는 물학군 중학교에서 반1등이요 전교 10등권인 내 성적에만 심취해 있었고 다른 건 아무것도 할 줄 몰랐다. 나는 내가 대전 촌놈이라는 것을 알았다.

내신은 7등급대이고 자습시간에는 문제집 공백에 과거 추억 시를 쓰는 나를 국어 선생조차 알아봐주지 않아서, 이러다간 어느 날 중학교 동창들끼리 “그 공부 잘하던 애 지금 뭐한대?” “몰라? 고등학교 가더니 망했나봐.”라는 대화와 함께 잊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자기주도 학습에 있어 공산당처럼 공부했다. '국어 선생이 된다고 했던 애가 진짜 국어교육과를 갔다!'라는 선전이 최우선 목표였다. 한때 사랑스럽게 포장했던 과거의 추억들을 우매했던 시절이었다며 채찍질하면 야자 시간의 졸음 정도는 쫓을 수 있었다. 나대는 애들을 내신으로는 끝내 이기지 못했지만 수능에서 실수를 하지 않았고 원하는 대학의 원하는 학과를 제때 갔다. 고등학교 후반부는 지금까지도 삶에서 가장 덜 후회하는 시기이다.

자습서를 좀 보고 100점을 맞음에 기뻐하여 거기서 멈추고 여생을 즐긴다... 이것이 내가 고작 17살에 세상에게 무릎 꿇린 이유였다. 삶의 목적이 '멈추고 여생을 즐긴다'에 있는 게 아니라면 끊임없이 세상 전체를 기준으로 자신의 위치를 가늠해야 한다. 중학교 2학년 때 나는 필사적으로 주기율표를 외워 암송을 통과하는 깡다구가 있어야 했다. 무릎 꿇리지 않고 나를 인정하는 사람들을 일찍부터 더 많이 확보하기 위해선 그랬어야 했다.

현재 나는 틈만 나면 이런 식으로 과거의 나 자신을 욕한다. 또한 그런 내용의 글들이 여기저기 적혀 있다. 이제는 그게 네 습관이라며 비아냥대는 친구까지 두고 있다. 그러나 진심으로 나는 과거의 내가 좋았던 적이 별로 없고, 그 이유가 내가 게을렀기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을 뿐이다. 나 자신을 아끼고 토닥이며 살아가라지만 그럴 만한 자격을 완전히 갖추었을 때 나 자신을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Behind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2019년 기준 대학 재학중인 동기가 학과 문집을 발간하는데 내 글을 쓰고 싶다고 했다.

지금 이 버전으로 수정하여 씨유 3000원 상품권과 맞바꿨는데, 그만 학과 문집엔 보다 분량이 길고 난잡한 원본이 올라가 찍혀버렸다.

살짝 분했지만 어차피 읽는 사람도 별로 없을테니 참기로 했고 내 진짜 글을 보고 싶은 프리미엄 학우님들께 이 블로그 주소로 찾아오라고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