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주의로 가득 찬 내면의 작은 나에게 말을 시켜 보면, “난 중학교 교사는 결코 되지 않겠다. 고3 담임을 할 것이다. 왜? 중학생은 반항이 일상이다. 그에 비해 고3은 자신이 할 일을 대개 알고 그에 전념한다. 나는 그들이 저마다의 길을 찾도록 부추겨주기만 하면 될 뿐이다.”라는 말을 듣습니다. 중학생 때 선생님들은 자유운동 상태인 학생들을 자리에 앉히거나 교실 뒤편/복도에 세우거나 자신을 위협하는 학생들 앞에서 쩔쩔매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어쩌다 선생님이 소리를 빽 지르기라도 하는 날이면 저절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오늘도 재밌는 날! ^^’ 물론 교원대학생인 저는 묵묵히 앉아 학원 숙제를 풀었습니다. 다만 비관주의와 이기적인 교육관을 형성할 뿐이었습니다. 교실에는 사랑과 공감 따윈 없다. 교사의 공무원 사회와 학생의 일진-왕따 폭력 사회가 따로 논다. 그 작은 사회에 젖은 학생들을 훈련시켜 실제 사회로 보내는 고3 담임의 역할이 가장 중요하다. 이런 것 말입니다.
그러한 비관주의가 교사가 되겠다는 저의 꿈을 접게 하지는 못했습니다. ‘문학의 아름다움을 멋들어지게 설파하겠다.’는 한층 숭고한 목표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폭력사회에 적당히 시달리면서, ‘일진’이라는 폭력 행사집단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 하는 숭고한 상위목표 달성을 위한 기술적인 고민이 필요할 뿐이었습니다. 사색의 시간이라기엔 비루한 고등학교 3년을 추가로 보내고 교육자적 고민을 마음껏 할 수 있는 교원대학교에서 1년 가까운 시간을 더하여 보내고 나니, ‘교사의 권위를 무너지지 않게 하는 방법’의 결론을 두 가지 선택지로 요약할 수 있었습니다.
1. 카리스마로 제압한다.
2. 민주적인 교사가 된다.
1.은 말 그대로 카리스마로 학생들을 제압하는 교사입니다. 관련되어 떠오르는 모든 멋진 선생님들의 모습이 이에 해당합니다. 이런 교사에게 가장 중요한 원칙은 ‘일관성’입니다. 학생들에게 처음 모습을 보이는 순간부터 선생님은 학생들의 생활 영역에서 초월해 있으며, 지금 보여주는 나의 모습은 끝까지 일정할 것이라는 인식을 심어주어야 합니다. 1.이 2.보다 부담되는 점은 연기력을 요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2.를 선호합니다. 그리고 세대의 교체에 따른 미래적 교육에 가장 어울리는 교사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민주적인 교사는 학생들과 같은 권한을 가진 인격체라는 인식을 공유합니다. 발표할 때 같이 발표하고, 실험할 때 같이 실험합니다. 선생님이 짜 놓은 책상 배치에 학생들을 앉혀 토론시키지 않고 학생들과 같은 자격으로 토론에 참여합니다. 선생님은 단지 수업이라는 파티를 준비한 사람일 뿐이며 따라서 손님인 학생들의 ‘누리는 서비스’와 안전을 관리할 뿐입니다.
그래도 학생이 교사를 존중하지 않는다면? 교사는 이에 대항하는 무기로 권위를 내세워서는 안 됩니다. 민주적 교실 수업 상황에서 “난 선생이고, 넌 학생이야.”라는 말은 “감히 내가 준비한 ‘민주적 수업’이라는 각본에 따라 행동하지 않아?”와 같습니다. 사실적인 근거를 들어 설득해야 합니다. 그런 설득이 성공하는 순간 가장 이상적인 또래 관계에서의 갈등 해결 방법이 교육되는 것입니다. 어릴 적부터 성장 환경 자체가 이렇게 변화한다면 학생들끼리의 폭력 사회는 사라지고, 서로의 약점이 아닌 강점에 집중하며 생산적인 논의가 활성화된 공동체를 기대할 수도 있습니다.
교사를 양성하는 기관에서 학문적 지식에 덧붙여 교육현장활동 같은 풍부한 교실 경험을 기본적으로 제공했으면 좋겠습니다. 많이 부딪혀보면 두 가지 선택지 이외에도 예비교사 자신에게 가장 맞는 방법을 찾아, 또 하나의 선택지가 만들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비국어 아이디어' 카테고리의 다른 글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관광 (0) | 2020.07.31 |
---|---|
국어교육은 어떻게 게임에 접목될 수 있을까? (0) | 2020.07.26 |
테크놀로지를 활용한 효과적인 인문학 교육 (0) | 2020.07.26 |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문과의 역할은 무엇인가? (0) | 2020.07.26 |
집밥당근마켓 - 동네 집밥/반찬/식재료 교환 장터앱으로 농수산물 판매량 땡기기 (0) | 2020.07.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