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문학

군차(軍茶) 변천사

머니코드17 2020. 7. 23. 13:16
728x90

출처 : 김병장네 실시간 이슈

내 군생활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중소기업 잡부'였다. 병사들이 저마다 컴퓨터 하나씩 끼고 사무업무(보급 전산)를 보면서도, 필요하면 밖으로 나가 상하차부터 창고 공사까지 근육을 사용해야 했기 때문이다. 건설현장에서 특별한 기술(용접, 목수 등) 없이 그저 필요할 때마다 나르기만 하는 잡부와 유사한 포지션이다. 건설 잡부였기 때문에 중간마다 종이컵 커피로 휴식타임 때릴 시간도 있었다. 오늘은 그 휴식타임에 뭘 마셨는지 변천사를 알아보고자 한다.

 

커피믹스

일이병이 눈치 보면서 마실 수 있는 것의 시작은 당연히 휴게실에 비치된 커피믹스부터였다. 가장 제너럴한 '노란색' 맥심 모카골드 마일드가 가장 많이 보였다. 공사 인부아저씨가 사회에서 들고 온 '하얀색' 맥심 화이트골드를 몰래 하나 먹어본 적이 있다. 당시 모카골드보다 화이트골드가 맛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좀 더 깔끔한 맛이 났던 듯했다. 대학시절 종이컵에 카누 하나씩 타먹고 매일 아침을 시작했던 기억을 되살리고 싶어서 면회로 카누를 조달한 후에는 그것만 타먹기 시작했다.

 

아이스커피

4월에 자대전입을 왔기 때문에 금세 여름이 찾아왔다. 진하고 뜨겁게 탄 맥심커피로는 온전한 휴식을 즐길 수가 없어서 선임을 따라 휴게실 냉동고의 얼음을 커피 컵에 넣어먹기 시작했다. 처음엔 다들 얼음 넣는 법을 몰라서 녹지도 못한 커피물을 숟가락으로 젓고 있었다. 그러나 곧 '커피를 적은 물로 진하게 완전용해시킴 -> 얼음을 컵 사이즈에 맞게 3~4개 투여'하면 커피가 다 녹은 상태로 온도를 낮출 수 있다는 걸 알아내고 사무실 안이 유난히 더울 때마다 책상에 비치해놨다. 입술에 닿는 얼음 사이로 들어오는 커피의 차가운 시큼함이 기분 좋았다. 기분 탓인지, 아이스커피는 올 스트레이트인 카누보다 맥심이 주는 달다구리함이 더 어울렸다. 그때 설탕덩어리라면서 무조건 배척하던, '달다구리한' 커피의 장점을 알아갔던 것 같다.

 

드립백

상병 말이 될때쯤 점점 개성있는 지성인처럼 살고 싶다는 욕구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외부 탓을 좀 하자면 욕구에 비해 병사 통제는 더 압제적이 되고 있었고 다른 군인 지인들은 꿀빨러 생활의 정점을 찍으며 열등감을 조달해줬다. 짬밥과 증식은 말할것도 없었고 군마트 과자 종류도 몇 안되었기 때문에 살 찌는 데는 도움되지 않는 새로운 미각이라도 경험해보고 싶었다. (휴가 때마다 먹는 것도 한정되어 있었다. 같은 술집 맥주 치킨 라면 뭐 그런거...) 매일같이 마시는 커피가 믹스 훨씬 이상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마침 병사이발소 이발병들도 드립커피를 내려먹고 있었다. 하지만 부대 안에서 드립 기구를 장만하는 건 현실적으로 쉽지가 않았다. 비치는 어디에 하고 간부에게 해명은 어찌할 것이며 매일 사무실과 생활관을 들고다니며 세척은... 이래서 드립백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한 휴가 때 대구 여행을 갔다가 커피명가에서 기념으로 사 온 드립백을 타먹어보니 내 눈앞에 펼쳐진 일거리들이 행복하게 느껴지는 경험을 한 뒤, '이 엄청난 드립백을 대량으로 사다놓고 하루에 하나씩 타먹으면 좋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곧 사용가능해진 휴대폰으로 침대에 누워 드립백 검색을 해봤더니 다들 터무니없이 비쌌고, 그나마 가성비가 괜찮은 커피창고 드립백 4종세트를 처음으로 부대로 주문해봤다. 우체국택배로 배송해달라 했더니 실수로 말을 안 들어서, '그나마' 친한 하사님에게 위병소 택배 수령을 부탁할 뻔했다. 어찌됐든 무사히 우체국택배와 행정계를 통해 나의 드립백 40개는 배달되었고 4개의 싱글 오리진 원두 공부를 시작하였다. 가장 흔한 이름이었던 케냐 aa는 그럭저럭 가볍고 상큼한 맛이 났다. 에티오피아 예가체프는 눈에 띄게 시었다. 콜롬비아 수프리모는 한국인이 가장 선호하는 맛답게 적당히 무겁고 적당히 상큼했다. 모든 스탯이 중간 성향이었다. 과테말라 안티구아는 무슨 담배를 피는 듯한 스모키한 향이 올라왔는데 이것 때문에 과테말라 안티구아를 가장 좋아하게 되었다. 아껴놓았다가 크게 스트레스 받을 일이 생길 때마다 타먹었다. 사무실에 나가지 않는 주말에도 드립백을 마시러 들어오곤 했다.

 

아인슈페너?

여름이 한번 더 찾아왔고 이제는 내가 어떤 방식으로 커피를 타 먹어도 눈치 주는 사람이 별로 없는 상황이었다. 한창 휴가때 맛본 아인슈페너에 빠져 있던 때라 군대에서 최대한 비슷한 방식으로 만들어먹었다. 맥심과 카누를 1봉씩 동시에 부어 극소량의 물로 엑기스를 만들고, 얼음 몇 개로 컵 내부를 덮은 뒤 미리 식당에서 챙겨온 우유를 (조금 마신 뒤 적당량을)흔들어 거품만 얼음 위로 부어주면, 아래의 커피층과 위의 거품층이 얼음이 만들어준 공간을 통해 어느 정도 분리된다. 이렇게 완성한 다음 아인슈페너 기분으로 마셔주면 된다. 거품을 입술에 대고 컵 밑을 들어올려 커피층을 거품 아래로 흘려보내 이중의 맛을 느낀다던가... 준비와 만들기가 다소 귀찮아서 그렇지 막상 한 컵을 잘 만들고 나면 역시 기분이 좋았다. 사무실에 친한 다른 부서 선임이 놀러오면 만들어줬더니 긍정적인 의미로 경악하였다. 말이 아인슈페너지 크림이 안 들어갔으니 아이스 카푸치노 정도가 되겠다... 카푸치노, 라떼 같은 스팀밀크 음료는 속만 더부룩해져서 안 먹는편이다.

 

 

홍차

말년에 오아시스 음악을 들으며 급 영국 문화에 관심이 생겼고(.....) 영국의 국민 음료인 홍차를 시도해보았다. 휴가때 마트에서 대충 아무 브랜드 피라미드 티백 홍차(스트레이트, TEALIA꺼였던 거 같다)를 산 다음 부대에서 뜨신 물에 티백도 흔들고 두세 번 우려먹었다.... 이렇게 해서는 절대 안 된다. 어떻게 하는지는 다음 글 참고

2020/03/14 - [여가] - 기본적인 홍차 티백 우리는 법, 밀크티 만드는 법 - 트와이닝 잉글리시 브랙퍼스트

 

기본적인 홍차 티백 우리는 법, 밀크티 만드는 법 - 트와이닝 잉글리시 브랙퍼스트

커피 그라인더를 사고 본격적으로 핸드드립을 해먹기 직전에는 홍차로나마 '뜨거운물 드링킹'취미를 충족했습니다. 뭔가 조금씩 마실 걸 옆에 두고 할 일을 하면 더 잘되는 체감 때문에, 홍차든

ojwisscary.tistory.com

그렇게 잘못된 방법으로 홍차를 '짜'먹으니 뭔가 향긋한 맛이 처음에 나는 듯하면서도 나중 갈수록 그냥 인내심을 훈련하는(...) 맛이 났다. 얼마 안 가 전역을 해서 망정이지 홍차 탈 줄 아는 후임이 나를 봤더라면 평생 까였을 것이다.

 

현재처럼 그라인더와 원두를 이용해 안정적으로 커피를 내려먹기 전까지 선행 경험들을 아이스 드립커피를 마시며 되새김질해본다.

 

 

 

+매점에서 최근에 팔기 시작한 콘트라베이스도 절륜한 맛이었다.

 

'기록문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대학교에서 C+를 받는 방법  (0) 2020.07.26
나의 팀워크...  (0) 2020.07.23
내가 교사의 자질이 없는 4가지 이유  (0) 2020.07.12
휴가 레퍼토리  (0) 2020.07.11
블로그 포스팅 알바 후기  (2) 2020.06.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