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90%가 좋아하고 한다는 축구는 나에게 트라우마로 남아 있다. 가뜩이나 감성적이었던 성격에 보수적인 명문고 기숙사 생활에서부터 군대스리가를 주입당한 결과다. 운동은 안 해도 어떻게든 살아질 것이라는 인생관은 더욱 절망적으로 변했다. '평생 스포츠와 담 쌓고, 체육 시간엔 절대 땀을 흘리지 않을 것이다.' 명문고의 학풍에서 소외된 체육선생의 방임형 수업은 그런 내 의지를 더욱 굳건하게 했다. 내 기본 체형 자체가 과체중에서 자연스레 돌아온 보통 체형이기도 했다. 많이 먹으면 찌고, 적게 먹거나 좀 많이 걸은 날이면 빠지고. 비만이 되지 않는 것만이 내 운동이었다. 상의 사이즈가 100에서 95가 됐다는 것을 확인한 순간부터 나는 나의 왜소함이 자랑스러워지기까지 했다. 나 여자였나..? 나의 마름을 '치열한 정신적 고민의 흔적'으로 혼자 정의내렸기 때문이다.
사실 학생에겐 공부라는, 운동을 하지 않을 좋은 이유가 있다. 밤에 잠도 자지 않고 책상에만 붙어 공부하는 걸로 시작하는 성공 스토리는 지금껏 숱하게 있어왔고, 자녀가 자기 의지로 그러는 걸 보면 일단 좋아하지 운동에 시간을 더 쓰라고 부추기는 부모는 몇 없다. 한 술 더 떠서 기숙사에서 혼자 다니는 자칭 책벌레 아싸였으니까 나에게 운동 제안을 거는 소스 자체도 없었다.
그러다 고3, 3월이 되자마자 점심시간마다 학교 뒷산을 오르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내 건강에 드라마틱하게 이상이 생겨 위협을 느꼈다거나 한 게 아니었다. 수업시간, 자습시간을 안 가리고 60~70%의 확률로 졸음에 떨어지기는 했다. 하지만 그건 부족한 수면시간 탓이었다. 교실을 나가 잠시 바람을 좀 쐬면 충분히 졸음을 쫓을 수 있었다. 운동 안 하는 조선시대 선비들도 다 그렇게 잠을 쫓았다. 나도 그렇게 하면 나아가 뜻을 이룰 것이었다....... 각설하고, 존경하던 역사 선생이 "가끔 오르니까 좋더만?"하고 슬쩍 넘어가듯이 말했었다. 산을 오르다 우연히 만난 척하며, 인생과 공부를 통찰하는 조언을 개인적으로 듣는 장면을 상상했다.... 자연을 보며 산을 올랐던 경험이 나쁘게 다가왔던 적도 살면서 없었으니까 등산을 해봐도 좋겠거니 하는 생각이 들었다. 헤멜 정도의 등산로도 아니었고 해발 168m의 조그만 산이었으니까 그걸 점심시간에 오른다고 공부시간을 버린다거나 체력안배에 지장된다거나를 걱정할 이유도 없었다. 그렇게 뒷짐을 지고 슬슬 산을 올랐다. 점심급식에 가공식품 부식이 나오면 갖고 나왔다가 정상에서 먹었다. 가끔 정말로 그 역사 선생과 만나기도 했다. 정상에선 심심해서 올라봤다는 이과 애들이 운동기구에 써 놓고 간 낙서를 보았다. 정상 바윗돌 사이에 나만의 표식을 남겨 두고 태풍이 지나가도 남아 있나 확인해보기도 했다. 그렇게 나 혼자만의 자연관찰을 반 년 가량 했다.
그 운동 축에도 못 드는 등산을 했다고 공부 능률이 드라마틱하게 좋아지지는 '당연히' 않았다. 애초에 땀도 안 났다. 기분이 드라마틱하게 상쾌해지지도 않아서 지루하던 수업이 갑자기 재미있어지는 일도 없었다. 드라마틱한 공부가 없었으니 드라마틱한 성적 상승도 곧바로 오지 않았다. 내가 수능 1등급 4개로 원하던 대학에 초수 합격하는 걸로 명문고 성적을 종결한 이유는, 나도 감지하지 못하는 폭으로 내신과 모의고사 성적이 눈곱만큼씩 올랐기 때문이다. 나의 등산도 똑같았다. 전에 조금 오르기 버겁고 숨이 찼던 급경사가 어느날 갑자기 별 힘들이지 않고 올라졌고, 절정기엔 가볍게 뛰면서도 정상까지 원테이크에 올라졌다. 한 번 조깅하고 내려오면 허벅지가 딴딴해져 있었고, 그제서야 상쾌하다고 할 만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그것을 상쾌라고 인지하지도 잘 않았을 것이다. 내 인식의 본위는 시간 날 때마다 축구하는 인싸들이 아니라 도서관에 틀어박혀 비교과에 열중하는 geeks에게 향해 있었으니까. 그들처럼 되고 싶었고 그들과 졸업의 연장선까지 친분을 이어나가는 상상도 했다. 나도 그들도 소극적이었기 때문에 그런 일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내가 사람들에게 먼저 손을 내밀기 시작한 건 명문고를 졸업하고 내가 좀 더 사교적일 수 있다는 확신이 든 이후부터라고 해도 된다.
다시 각설하고 정리하자면, 고3때 야매 수준의 운동을 시작했더니 '점진적 과부하'를 느꼈다. 헬스에 관심을 한 번이라도 가져 본 사람이라면 점진적 과부하의 대략적인 의미를 알 것이다. 그리고 그 경험은, 공부를 할 때도 점진적 과부하와 완벽하게는 아니더라도 얼추 비슷한 느낌을 가지고 하면 뭔가 된다는 확신을 주었다. 70분 타이머를 놓고 영어 모의고사 1회차 풀기를 매일 하면 점점 시간이 짧아진다. 안 외워지는 교과서 내신은 볼펜으로 밑줄과 날개에 자기 언어로 정리 계속 문대다 보면 외워진다. 안 풀어져 있어서 미심쩍은 ebs 교재는 날 잡아서 그날 다 끝장내면 된다. 운동을 하다 보면 잘 안 되는 날이 있다. 공부도 그런 날이 있다. 그럴 땐 통상적으로 해야 되는 것만 끝내고 그날 하루는 놀아버리면 된다(어제까지 꾸준히 해왔고, 논 다음날도 공부할 거라는 전제 하에). 나는 '한번 데이고 나서야 깨닫는' 우둔분자이기 때문에 운동이라는 몸으로 체험하는 방식으로 그걸 터득했다. 그 전까지는 공부가 안 되고 심경이 복잡하면 그냥 자책하며 울어버리는, 앞서 말했듯이 감성적인 성격이었다.
운동은 이렇듯 공부에 있어 심적인 낙천성을 갖게 해 준다. 낙천이 나쁜말 같다면 패기, 기업가 정신이라고 이해해도 좋다. 그리고 그렇게 공부할 시간을 뺏지도 않는다. 헬스를 본격적으로 시작해도 하루 운동시간이 무슨 운동 몇 회씩 몇 세트, 다른 거 몇 회 몇 세트 해서 40~50분 정도로 1시간을 채 넘기지 않는다. 더 하려고 해도 온 근육에 힘이 빠져서 못한다. 매일 줄넘기나 운동장 달리기를 한다고 해도 그걸 공부 시간에 지장이 올 만큼 2~3시간 연속으로 할 수 있는가? 군대에서 운동 지식이 전무할 때 런닝머신에서 2시간 동안 걷기만 해 본 적 있는데 그건 자해였다.
그리고 운동을 할 때는 어쩔 수 없이 당장의 감각에만 온 정신을 집중하게 되는데, 이는 샤워할 때와 비슷하다. 생각을 정리할 수 있다고 일단은 말해두겠지만 직접 해보면 더 확실히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냥 샤워할 때 노래가 부르고 싶고 정신이 순수해지는 경지에 다다르는 느낌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공부에 지친 뇌를 쉬게 해준다는 점에서 나쁘지 않잖은가. 운동이 끝난 직후 단단해지거나 뭔가 중심이 잡혀져 있는 내 몸을 느끼는 쾌감은 덤이다.
나처럼 어떤 운동도 과거에 해본 경험이 없어서 무슨 운동부터 '고3인 와중에' 시작해야겠는지 모르겠다면, 땀이 나면 어떤 운동도 좋다. 일상적으로 방문하는 곳을 자전거로 대체한다면 상당한 운동 효과를 볼 것이다(기어를 저단에 넣고 오르막이 올라진다면, 생활 허벅지 고수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달리기나 줄넘기는 너무 단조로워서 금방 흥미를 잃어버릴 것이다. 자신이 남자고 훗날 성인이 됐을 때 '건장한 체격'을 갖기 원한다면, 맨몸운동이나 웨이트 트레이닝을 미리 입문해두는 것도 좋다. 지금 나도 그렇게 되기 위해 프로틴까지 먹어가며 근육을 찢고 있다. 맨몸운동은 별 거 없다. 썸네일 사진처럼 별별 방식으로 푸시업하기, 오토바이 자세로 앉았다 일어나기 반복인 스쿼트, 턱걸이가 전부다. (물론 턱걸이가 굉장히 어렵겠지만, 푸시업과 스쿼트가 수학 3점, 4점짜리 문제들이고 턱걸이가 1등급 거르기용인 29번, 30번이라고 생각해두자. 맨몸운동 기준 드라마틱 몸 변화의 시작은 턱걸이라고 본다) 웨이트 트레이닝, 즉 중량운동은 중량 그 자체로 점진적 과부하를 실천하고 인터넷에 알려진 루틴을 따라해가면 된다. 자신 몸이 감당하기에 운동 강도가 높다면 3개월 후엔 가시적인 변화가 나타날 것이다. 군대 때 상병 여름부터 퇴근시간 직전 창고에 틀어박혀 스쿼트 100개와 팔굽혀펴기 100개를 겨울까지 하고 식이조절은 신경쓰지 않았더니 몸이 쥐꼬리만큼 좋아진 게 아쉬워서, 전역하고도 학교에 못 가고 싸이버강의 하는 김에 혼자 공원에서 턱걸이 1개에 도전하다가 써본다...
홈트레이닝 같은 접근성이 좋은 운동일수록 좋다고 본다. 수영은 훌륭한 운동이긴 한데 공부를 놓고 수영장까지 가야 하잖은가. 달리기만 해도 신발 신고 밖으로 나가야 된다. 미세먼지 많고 비오면 끝.
등산 이후로 고3 여름 한때엔 교내에 유행하던 배드민턴도 잠깐 해보면서, 운동과 공부와의 관계 같은 건 제쳐두고 순전히 쾌감을 즐겼던 것 같다. 땀범벅이 된 채로 교실에 들어오면 뭔가 학교생활의 한 날을 알차게 장식했다는 그런 느낌... 그런 느낌을 고3때 몰아서 즐겨두려고 애쓰긴 했다. 그런 점에서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친목용으로 풋살이나 농구 제의가 들어오면 바로 가능한 지인들이 부럽다. 학창시절에 축구와 농구를 했었으니까 가능한 거지. 그것도 교양이다. 이렇듯 이런저런 이유로, 시간이 금이라는 고3때 운동시간은 있으면 좋은 것 같다. 최소한 나쁜 점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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