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에 입학할 때 선행학습을 하나도 안 해갔다. 정확히는 개념서로 1단원을 눈만 바르고 가는 정도에서 그쳤다. 그게 나를 명문고로 보내서 기쁜 동네 수학학원에서 한 달 안에 해줄 수 있었던 조치였다.
교실에서는 (중학교에서 봤고 존경했던 품격 있는 선생님들보다 상대적으로)가르치는 법 자체를 모르는 듯한 선생님이 삼차방정식의 해를 구하고, 복소수를 자유자재로 다루다가 "이거 다 너네들 아는 거지?"하면서 넘어갈 때, 아는 게 조립제법밖에 없었던 나는 부호화시켜서 기억할 수 있는 정보란 "조립제법은 조선시대의 조립제라는 수학자가 만든 거래"라는 유치한 조크밖에 없었다.
다행히 옆자리의 친구를 사귀었는데, 그 친구는 출신지역 학원에서 수학 선행을 기하-벡터까지 빵빵하게 한 다음 그 학원 반 동료들이랑 같이 명문고에 입학한 영재였다. 내 출신 중학교에서, 아니 그 학군 전체에서 그 급의 명문고를 간 98년생은 나밖에 없다는 타이틀을 매우 아끼던 나는 그 친구가 사는 동네의 지역수준이 엄청나다고 믿었다.
친구가 될 수 있을 만큼 성격이 맞았기에 망정이지, 그 친구가 없었다면 나는 모르는 문제를 물어볼 소스가 0이었을 수도 있었다. 그떈 그게 중요했다. 뭔진, 왠진 몰라도 그 명문고엔 일단 모르는 게 생기면 누구든 붙잡고 물어보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다. 나에게 친분이 1도 없고, 가르치는 법을 모르는 듯해 혐오까지 했던 선생님에게 쭈뼛쭈뼛 다가가는 일은 고려되지 않았다. 문제집 해설지를 보고 혼자 이해할 여력, 즉 기초적인 설명 이해력은 없었다. 일단 그런 기초 없는 상태로 어물쩡하게 있다가 입학 한 달만에 친 중간고사 수학이 27점이었다.
나는 내 전속 질문 비서 내지는 수학 과외선생님이 생겼다고 믿고 수업시간에 예제 풀 때마다, 자습시간에 내 쎈을 풀 때마다 이해 안 되는 부분이 있으면 옆자리로 문제를 들이밀었다. 착한 친구는 내가 모르는 문제를 물어볼 때마다 꿋꿋이 알려줬다. 방해가 막심했을 텐데 고마웠다. 가끔씩 너무 귀찮아서 낸 짜증도 27점 앞에서 구겨버린 내 자존심이 감당해버렸다. 오래된 교사 위로 고즈넉한 봄 햇살이 내리쬐던 명문고 생활 극초반은 그 친구와의 추억이 대부분이다.
감상적인 회상이야 그러했다 치고, 대학 갈 성적의 관점에선 나는 그 수학을 잘하는 그 친구에 비해 아주 미래가 흑색이었다. 내가 마음껏 그 친구의 문제 알려줌권을 인출했던 심리 저 밑엔 '쟤는 어차피 압도적인 수학으로 스카이 갈 거니까 이대로면 대학 전혀 못 가는 내게 무제한으로 알려줘도 된다. 지식의 곳간을 평생 열어줘야 된다'가 깔려있었을 거다. 지식이 그렇게 주거니 받거니 하는 퀀티티를 단위로 했다면 차라리 좋았을 것을.
갈수록 짜증나하고, 내 질문을 빈정거리던 (매우 합당한 대우였다. 오죽했으면) 친구의 수학멘토/교사를 대신한 수학 봉사는 불행하게도 내 수능 수학 성적 상승에 미미한 도움을 줬다. 당장 내가 그 친구에게 물어보고, 이해하는 자습용 문제 수준이 명문고의 수학 내신 수준의 반도 못 따라갔다. 나는 개념원리 RPM과 쎈을 더듬거리며 푸는데 내신수학은 블랙라벨 스텝 2,3급이었다. 상위권용 고난도 문제집이라... 중학교 때 '나 때문에 기뻐하기 전' 동네 수학학원이 내게만 에이급수학을 풀렸던 적이 있었는데 그 살인적인 난이도에 나는 집에도 못 가고 풀다가 울었다. 시간이 흘렀지만 감사하지 않다. 감사할 거면 말랑한 시험문제를 출제한 품격있던 중학교 교사들에게 감사해야지. 사실 나를 수능 수학 1등급으로 만들어 준 건 신승범의 인강과, 고쟁이, 너희들의 기출문제, 어삼쉬사를 비롯한 강한수학 커리큘럼 일체였다. 내가 그렇게 수학을 잘 보고 현역으로 대학에 붙은 반면 그 친구는 미끄러져 재수를 했다.
고1때 나와 친구의 처지 차이와, 고3 수능 끝날 때의 처지 차이 사이의 상관관계는 물론 전혀 없다. 나랑 그 친구가 3년의 수험생활 때 뭘 했는지 비교할 거리 자체가 없다. 최소한 둘 다 나름대로 열심히 했다는 건 똑같다. 나도 이 이야기의 시간적 처음과 끝만을 말하고 싶다. 이 글의 제목의 단순한 의미 그 자체를. 저학년 때 아무리 실력 부족을 호소해도 괜찮다. 수능 전날 만족할 성적을 얻을 만큼 공부를 해놓은 상태고, 성공해서 대학을 갈 거라면. 문과생 기준 인강 선생님이 들으라고, 연습하라고 해 주는 커리큘럼에 편안히 올라타 시기별로 착실히 따라가기만 하면 어떤 과목이든 섭렵할 수 있다. 문제 공급이 좀 적다고 느끼면 찾아서 풀자. 문제 확보 최우선순위는 평가원 기출, 교육청 기출이다.
인생사새옹지마는 수험생활 3년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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