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독후감

김훈 - 칼의 노래 (with 장정옥-비단길)

머니코드17 2020. 3. 8.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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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이 글 작성자 본인은 다음 링크의 '다시 쓴 독후감 - 칼의 노래, 비단길' 게시글의 작성자와 동일함을 알려드립니다.

이 서평을 다시 언급하는 이유는 그때 썼던 글을 첨삭과정을 거쳐 지금 글 쓰는 스타일로 바꿔보고자 함이니, 그 점 참고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후 이 '다시 쓰는 독후감' 카테고리에 올리게 될 서평들에게도 이 점은 똑같이 적용됩니다.

애초에 도둑질할 목적이라면 원본과 고친글을 동시에 올리는 미친짓은 안 할겁니다.

https://blog.naver.com/ogu123/220768333806

 

다시 쓴 독후감 - 칼의 노래, 비단길

칼의 노래 작가 김훈 출판 문학동네 발매 2012.01.05. 리뷰보기 비단길 작가 장정옥 출판 북멘토 발매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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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얘기를 지금껏 많이 팔아왔지만, 이 카테고리 글 대부분이 고등학교 때 쓴 글들이 모티브이므로 한번 더 그때 이야기를 해보겠다. 입학사정관제(학생부 종합전형의 전신)로 국어교육과에 입학할 거라는 내 꿈은 막연했다. 당장 내신이 빡센 기숙형 명문고 생활 적응부터 힘들어서 꿈을 위해 어떤 비교과 활동을 준비해야 하는지를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멀티태스킹에 능했다면 잘 해나갔을지도 모르겠으나, 애석하게도 난 그런 재주는 없었다. 그저 누가 진로를 물어보면 국어 교사요 하고 대답하는 정도였다. 멀티태스킹력은 없었지만 황소고집은 있어서, 꿈이 왜 바뀌어야 하는 지도 모른 채 내 꿈은 국어 교사로 한결같았다. 목적지만 있었지 목적지로 가는 길은 암흑이었다. 나는 내 능력이 확대될수록 국어교사로서의 자질을 입증할 수 있는 기회를 잡기 위해 애썼다. 아무리 명문고라지만 의대도 공대도 아닌 어문계열 지망생에게 비교과를 떠먹여줄 역량은 없었다. 오는지도 모르게 왔다가 한 번 지나가면 다시는 오지 않는 기회를 가능한 한 많이 붙잡으려고 애썼다. 대회도 여럿 나가고, 책도 읽었다. 덕분에 나는 그쪽 분야에 어떻게든 더 가까워졌다. 기회를 잡으려는 막연한 욕심과, 막연한 욕심이 굳어진 습관은 내 진로와 생각의 과정을 더 구체적으로 만들었다. 그때 읽은 책들 중에 다 읽고 나서도 잘 알아차려지지 않는 의미를 추측하느라, 별로 정교하지 못한 내 생각이 힘든 경로를 헤쳐 나가야 했던 책 두 권이 기억난다. 한동안 그의 문체를 본받으려 시도했던 소설가 김훈의 ‘칼의 노래’와, 여러 가지 이유로 반복해서 읽은 장정옥의 ‘비단길’이다.

 

‘칼의 노래’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는 이순신의 이야기를 그린다. 소설에서 묘사되는 이순신은 한없이 나약한 개인이다. 전후방을 막론한 전쟁의 모든 모습, 고통받는 백성들, 떠내려가는 시체들, 그 냄새, 느껴지는 모든 감각들은 이순신의 심신에 깊은 상처들을 남겼다. 해전에서 승리할 때조차도 이순신은 늘 죽음을 떠올렸다. 죽음이 아닌 것, 즉 낡고 끈적한 생명력이 맺힌 그의 독백을 받고 빛나는 것은 백성들이 그에게 만들어 준 칼이었다. 이순신은 그 빛을 칼의 울음이라고 생각했다. 죽음이 아닌 것은 그에게 울음이었다. ‘삼척서천산하동색(三尺誓天山河動色)’, ‘일휘소탕혈염산하(一揮掃蕩血染山河)’가 새겨진 칼의 울음에는 그의 혈육, 그리움, 임금, 군사, 백성, 머지않아 찾아올 자신의 죽음이 서려 있었다. 노량해전에서 전사하는 순간, 배 밖에서 침몰하는 적선을 바라보는 순간까지도 이순신의 서술은 속도있게 '사실만을' 전달하다가, 몇 줄 안 되는 의식의 흐려짐으로 책을 끝낸다.

 

책을 덮었는데 허무함이 들어서, 나는 끝부분의 의미를 곱씹어야 했다. 소설이 끝나기 직전까지 분명 이순신은 고통스러운 시간의 흐름과, 그에 맞서 의미를 만들어 내려는 삶의 움직임을 담담하게 묘사로 그려내고 독백으로 되뇌고 있었다. 이순신의 삶의 움직임은 병장기는 남고 목숨은 사라지는 전쟁 속에서 사람다운 삶을 살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몇 줄 안 되는 전사 장면에서 한 번에 의미를 잃어버렸다. 특히 이순신이 자신의 전사를 ‘자연사’로 받아들였고, 그것을 감사해하는 부분은 '떡밥 회수'가 제대로 무산된 느낌이었다. 죽기 전 그의 삶이 남긴 가치들은 끝에 가서 아무런 조명을 받지 못했던 것이다. 그게 내가 이해해야 할 것이었다. 사실 죽음은 삶이 지녀 온 모든 가치를 없애 버리는 현상인 게 당연하다. 우리들은 삶의 가치를 잃기 싫어서 계속 살아 있기를 원하는 것이다. 이순신은 거의 모든 상황에서 죽음을 생각했다. 나도 내 죽음을 그토록 오래 들여다보고 있으면, 실제로 찾아온 죽음을 이순신처럼 감사해할 수 있을까? 살아 있는 동안 머릿속에서 수없이 죽음이 맴돌면, 진짜 죽음이 먹어치운 삶의 모든 가치들은 그래도 아까울까? 함부로 추측해보자면, 그 아까움은 인간이 사회를 살면서 키워 온 경제적 가치관으로 죽음을 보상받으려는 행동기제인 것 같다. 개인에게 죽음이 지닌 가치-보상의 기준 아닌 무엇은, 사실 인간이 살아가는 동안 세운 가치관과 근본적으로 다를지도 모른다. 이런 식으로 나는 ‘칼의 노래’의 끝부분인 이순신의 죽음에서 의미를 구하려 했다.

 

‘비단길’은 18세기 말 조선에 처음으로 천주교가 들어오기 시작했을 때, 순조 대신 수렴청정을 하던 정순왕후가 천주교 신자들을 대대적으로 탄압했던 신유박해가 배경인 소설이다. 중국인 신부 주문모를 비롯하여 300여 명의 천주교인이 처형당했는데, 그 중 정약용의 셋째형 선암 정약종이 평민 소년 주인공 수리의 이웃이라는 설정이다. 천주교인 황사영이 프랑스 주교에게 구제를 요청하는 내용을 위에 적어 보내려던 비단은 누에를 치는 수리네 집의 것이다. 그러나 역사가 말해주는 대로 선암과 황사영의 뜻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수리는 진리 앞에 정직한 영혼을 위해 당당한 죽음을 선택하는 선암을 말리지 못한 채 ‘사방이 확 트여 있는데도 아무 곳으로도 가지 못하는 괴로움이 이렇게 삭막하고 쓸쓸한 것인 줄 몰랐다.’며 고통스러워한다. 그도 그런 것이 수리는 평범한 조선의 상민이었다. 민초 한 명은 너무나 미약해서, 종교와 당쟁이 한데 어울려 갈등하는 역사의 수레바퀴에서 언제나 맥없이 끌려 다니는 존재다. 선암의 죽음을 지켜본 수리의 고통은 조선 민중의 고통이었고, 역사적 퇴보를 통제하지 못하는 무력감에 대한 분노였다.

 

하지만 선암을 비롯한 천주교인들의 죽음도 삶의 가치가 완전히 소멸하는 정체 모를 현상인 걸까? 나는 그들이 죽은 이후에도 소설의 시점이 계속해서 수리에 맞춰 이어지는 것을 보고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다. 수리는 선암의 죽음 앞에서 무력감에 젖어든다. 하지만 이후 수리는 정약용이 있는 강진으로 길을 떠나면서, 삶과 죽음 사이에서 회의하고 까닭 없이 세계를 살아가는 자신의 존재에 관해 고민한다. 그리고 자신이 살아야만 하는 슬픈 삶과 사랑하는 사람에게 다가가는 행복한 과정을 자신이 걸어가고 있는 ‘길’에 동일시한다. 죽음은 한 사람의 삶에 존재하던 모든 성질을 소멸시킨다. 하지만 주변의 나머지 사람들은 그 사람에게 닥친 죽음을 지켜보며 자신이 갖고 있는 삶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새로 부여한 의미가 인생의 방향을 재결정하고, 그것이 퍼져 나가 사회와 역사의 변화로 이어지는 것을 보면 죽음의 영향은 제법 강력하다. 그런 ‘위대한 죽음’을 생각하면, 선암과 황사영 말고도 전태일, 유관순, 그 밖의 많은 이들을 우리 역사 속에서 생각해 낼 수 있다. 역사의 수레바퀴가 혼돈과 파괴가 아닌 발전과 번영으로 돌아갈 수 있게 개인들의 죽음이 상당한 기여를 한 것이다.

 

이렇게 죽음은 한 사람의 존재를 삭제하지만, 산 사람의 존재를 새로 규정시킨다. 나는 ‘칼의 노래’를 읽으며 나약한 개인의 죽음으로부터 의미를 끌어내려는 시도를 했고, ‘비단길’을 읽으면서 사회적 파급의 촉매제로서 죽음을 바라보려 했다. 그 관계를 생각해 보면 죽음은 죽음이 있는 사회에 어떤 방식으로든 작용하는 유용성을 지니면서도, 존재의 소멸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쉽게 권장되지 못하는 모순을 안고 있는 듯하다. 사실 이런 생각은 아직도 확신할 수 없다. 내가 아직 죽음을 겪어보지 않았으니까. 죽음은 죽는 거니까 인간의 추론이 결코 닿지 못한다는 사실은 죽음의 ‘몰가치성’을 다시 한 번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생각이 한계에 다다랐다고 그 생각이 완전히 없어질 순 없다. 비록 내가 생각한 것은 죽음이었지만, 생각이 남긴 궤적은 여전히 내 삶 안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책을 읽고 어렵게 꿰어 나간 생각의 진주가 삶 속에서 의미를 잃지 않도록, 내가 한 생각과 나 자신을 온전히 보존하고 계속해서 닦아야겠다. 내 자신부터 닦던 중에 기회를 발견하고, 국어 교사를 더욱 선명하게 꿈꾸기 시작한 내 경험에 비추어보면 내가 깨끗해지는 것이 나를 둘러싸는 세상을 깨끗하게 만드는 첫걸음이기 때문이다.


보다 글이 완성도를 지닌 2학년 때 글이라서 읽어보는 일 자체는 만족스러웠으나, 어찌됐든 고쳐주고 싶은 부분은 있었다. 그래도 이때가 가장 책을 진지하게 읽던 시절이 아니었을까. 김훈 작가님을 따라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추론방식은 지금 보면 반은 좋고, 반은 맘에 안들지만 전체적으로 아주 깨끗한 마음을 가지고 쓴 글이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다시는 저때처럼 글쓰는 행위 자체에 온 마음을 투자하지 못할 것이다. 이런 글에 은상을 준 교내대회도 참 빙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