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독후감

김훈 - 내 젊은 날의 숲

머니코드17 2020. 6. 30. 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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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간자습을 넘어선 심야자습 후 호실로 들어와서, 잠이 올 때까지 랜턴을 책에 들이대고 약 30분씩 읽었다. 그러므로 책의 모든 장은 전짓불 빛에 눈이 짓물러 있을 것이었다. 그 모든 글들은 이제 내 편이 아닐 텐데...

 

'내 젊은 날의 숲'은 여러 일들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변함없는 평탄함을 그려낸다. 주인공은 시화평고원과 자등령이 펼쳐진 민간인 통제구역 내의 수목원에 식물들의 세밀화를 그리는 계약직 공무원으로 채용된다. 거기서 몇 안되는 사람들을 만나고 그림을 그리려 자연을 관찰하고 아버지의 일이 이어지고 하면서 이래저래 시간과 책 페이지가 흘러간다.

 

사실 이순신의 전쟁 중 행적을 다룬 김훈의 대표작 '칼의 노래'도 해전이 자연의 자정작용인마냥 담담하게 문장이 흘러간다(니 '내젊은날의숲'에 대해 할말 별로 없지?). 이렇듯 김훈 소설의 서스펜스 꺾은선그래프는 소설의 정석적 특징인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을 따르지 않고 세속 위에서 흐름을 지켜나가며 평탄하다. 수능 현대소설 지문에 이 책이 나온다면 '표현상 특징'묻는 문제가 우선 나오고, 평가원이 좀 더 궁리하면 김훈의 염세주의를 설명하는 <보기>주고 풀게 하는 문제가 나올 수 있겠다. 일체의 자극이란 것을 가능한 세탁하는 것이 김훈 문체의 주요 특징 중 하나이고 어린 난 그것에 흠뻑 취해 고등학교 시절 글쓰기하는 내내 따라했었다. 상처를 많이 받아 염세와 관조가 절박하게 필요했던 상황이었겠지. 김훈은 내 문사철 인생의 확실한 일부분을 떼어먹었고 23살이라 아직까지는 대주주이다. 하지만 이런 염세-관조는 지금 세상엔 어울리지 않고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더 큰 자극으로 맞서야 한다는 게 지금의 내 입장이다. 한국인 신문기자가 일본 골목길에서 폭력배를 만나니까 하면서 갑자기 힘깨나 써봤다는 설정이 등장하여  동료와 함께 -처리-하고 맨땅헤딩 열정으로 K-핵개발을 추진시키는 '...그 찐따같던 기자 맞냐?'작품을 쓴 우리 학교에서 강연한 김모 작가와 대비된다. 이래저래 김진명은 참 재밌는 이야기꾼이다. 

 

그럼에도!

 

김훈 같은 글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는 세상의 많고 많은 맛들 중에 차(茶)의 맛, '시간을 어떻게 흘려보낼까 궁리하지 않고 흘러간 시간을 한 번 더 곱씹도록 하는'맛이 있어야 하는 이유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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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3때의 글인데 이때부터 현재 내 글 쓰는 회로와 본질적으로 동일해지기 시작했다. 비록 내 취향이 아닌 책을 소재로 쓴 글이지만 언제나 내 눈앞에 있는 것 이상을 원하던 마음은 같아서가 아닐까? 덕분에 글 다듬기가 바로 작년것보다 압도적으로 수월했다. 지금 같았으면 "에이 따-분해"하고 던져버렸을 주제의 책을 존중한 고3때의 나에게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