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문학

특기학교의 기억 #2

머니코드17 2020. 6. 22. 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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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14 - [기록문학] - 특기학교의 기억 #1

 

특기학교의 기억 #1

위는 내가 공군 훈련소를 마치고 특기학교로 옮겨진 때에 맞추어, 친구가 내 계정을 받고 피드에 올린 '생존신고&인편 좌표'이다. 내가 무슨 특기학교를 갔고, 특기학교가 뭘 하는 곳인지는 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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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생 번호는 기분나쁘게 44번이었다. 기분이 나빠서 곧바로 호실근무(호실장), 시설근무 등을 뽑을 때 아무 지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그냥 이 압제가 나를 피해가기만 바랬다. 하지만 조교들은 중앙 복도로 교육생들을 몰아넣어 쭈그려 앉게 했고 나는 첫날밤 불침번으로 선정되었다. 그때의 엎친데 덮친격의 짜증은 지금도 기억한다. 아침에 눈을 뜰 땐 집이었는데 이 하루의 끝은 2~3시 불침번이라니. 어느 호실의 몇 번을 깨우라는 지시는 한 번 잘못 들으면 끝나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은 군생활 초반에 수두룩했지만 그럴 때마다 나는 한 번도 내가 못 들은 지시사항을 되묻지 않았다. 즉 용무신청을 절대 하지 않았다. 오줌이 마려우면 그냥 참았다. 그럴 경우 행동은 지시사항을 한번에 잘 듣거나, 지시사항이 나에게 안 들렸으니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단 듯이 행동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내가 아직 살아있는 게 신기하다

 

관물대가 벽걸이로 달린 쌍팔년도식 내무실을 같이 쓰는 동기 교육생들과는 말을 섞지 않았다. "사회에서 날렸으니까 군대에서는 조용히 있자."라는 손 씻은 범죄자 코스프레를 심각할 정도로 철저히 이행했다. 가끔 훈련소 동기 호실을 찾아가서 면회 때 얻어온 초코파이/핫초코를 나눠줄까. 같은 구역 청소였던 옆 침상 전우님은 같은 대전에 살아서 17비, 계롱대 등 충청권 자대에 관한 의논을 해오곤 했다. 아는 선에서 공군병사수첩의 지도를 펼쳐가며 교통편 등을 답해주니까 "이 분 지리 엄청 잘 아신다"며 비행기 띄워줬다. 고맙습니다^^ 통성명은 자대배치 이틀쯤 전에야 취침시간에 시작되었다. 로직, 큐베이스를 읊으며 DAW라고 아세요?를 한 다음 언젠간 이걸 만지며 예술을 할 거라는 뜬구름을 잡다 못해 수증기가 되어 사라지는 소리나 해댔다. 정신이 불안할 때의 전형적 증세다.

 

나는 자격지심이 엄청 높아서 "기본군사훈련단이라는 무인권 지옥을 탈출했으니 특기학교는 내 명예로운 탈출에 걸맞은 대접을 해줘야 한다."라는 어젠다가 2주 내내 머릿속 최상위에 위치해 있었다. 식사이동을 할 때도, 혼자 밥을 먹을 때도, 학과강의 쉬는 시간에도 그 생각뿐이었다. 분명 동기부여를 시키지 않았다는 점은 큰 메리트였지만 파란 모자들의 근본 없는 통제 태도(나보다 못 배운 사람에게 가르침 당하는 일은 살면서 이제 제발 없었으면 좋겠다), 통성명을 안 했으니 24시간 내내 닫고 살아야 하는 입, 그에 비해 군대 바깥 사람들에게 이곳의 상황을 묘사해주고픈 간질거리는 혀 등등은 2주 내내 역겨운 기분을 들게 했다. 시간이 조금씩 흐르면서 그 역겨움을 해소하는 방법을 하나 둘 찾아냈고 나는 그런 나 자신을 매우 슬기롭게 여겼다.

 

첫 번째 해소는 효전화 몰래 하기였다. 아침 학과 출발 준비시간에 누가 봐도 효전화 시간이 아닌데 복도에서 효전화를 들고 통화하는 교육생 두 명을 보았다. 교대하면서 망을 보는 듯했다. 뒤에서 서성거리며 볼일 보는 척을 하다가 두 명의 통화가 끝나자 "지금 효전화 시간 아니지 않습니까?"하고 물어봤다. 대답은 간단했다. "이거 몰래 쓰는 건데요?" 그 다음 잠자리에서 내 확신이었다. '내일 결행한다.' 전화를 엄마에게 했는지, 대학 동기에게 했는지... 잘 기억이 안 난다. 만약 엄마에게 했다면 난 이거 몰래 하는 거라고 자랑했을 테고 엄마는 그러지 말라고 만류했을 것이 분명하다. 부모님 앞에서 나쁜 짓을 하면 안 된다...

 

두 번째 해소는 '그' 면회였다. 아직 아빠가 창원에 직장 자취를 해서 엄마는 내 면회를 주말 연속으로 할 수 있었다. 2주 동안의 주말 4일을 면회 와주겠다고 해서, 그렇게 해달라고 했다. 나의 초초초 메타 자격지심으로 인해 엄마의 1박 2일 여행길을 일절 만류하지 않았다. 불효+4 적립. 나는 수많은 먹을 걸 요구했고 엄마는 크리스피 도넛, 써브웨이, 버거킹, 유부초밥, 방울토마토, 초코파몽쉘을 준비해왔다. 갑자기 내가 왜 지금 학점을 잘 받아와야 하는지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하루는 부대 밖으로(진주시 한정) 나가는 영외면회를 할 수 있었는데 엄마는 진주시에서 뺑뺑 도느니 창원 아빠 집을 가자고 하여 그렇게 했다. 창원으로 가는 차 안에서 나는 군복을 교원대 생활복으로 갈아입었다. 군화를 벗고 파란 저지를 입으니 기분이 짜릿했다. 아빠의 pc로 페이스북과 블로그에 근황글을 치며 이것이 공군의 꿀빠는 군생활의 시작이라고 확정지었다. 내 자격지심이 충족되는 몇 안 되는 시간이었다.

 

세 번째 해소부터는 특기학교를 근본적으로 벗어나지 못하는 궁여지책들이었다. 생활관 건물에 선진병영의 기반시설인 작은 도서관이 있었고 거기서 <아홉살 인생>과 <광장>을 빌려 읽었다. 대화가 없는 개인정비시간 그냥저냥 시간 때우는 데 제격이었다. 그 밖엔 무한대 금액으로 느껴지던 나라사랑카드 긁어서 자판기의 탄산음료랑 딸기우유 빼먹거나(늦게 가면 파우더 떨어져서 맹물 나온다고 학과 끝나면 득달같이 달려갔다) 날짜 정해서 간이BX 이용한것(창문으로 메뉴 말하면 조교가 꺼내주는 구조였는데 "본젤라또 주십시오"했다가 "부탁드립니다라고 해라"라고 쿠사리 먹었다) 등등 자잘한 것들이었다. 티비시청도 개인정비시간에 가능했는데 거기서 트와이스의 What Is Love? 공개무대를 봤다. 그 노래는 내 슬픈 군생활 극초반을 대변하는 노래이다. 입대곡까지는 아니고 대충 신병곡이라고 할까. 자대배치 받은 첫날 점심 식당에서도 그 노래가 흘러나왔다. 트와이스도 그렇고 아이돌 영상은 특기학교 말년 진도 끝난 학과 교관들이 머리 식히라고 질리도록 보여줬다. 준비해온 영상들도 왜 똑같은지 레드벨벳 피카부에서부터 AOA 사뿐사뿐, 걸스데이 여자대통령 등등 철지난 3세대 아이돌까지 경향성을 노트에 끄적여볼 정도로 봐야 했다. 

 

캠페인 같은 것의 일환으로 교육생들보고 공익 포스터 그리기 공모를 시켰는데 상 타면 가점을 준다고 하여 점수 경쟁력이나 얻어보자는 생각으로 참가해서 2등상을 탔다. 주제를 '군사보안'으로 하고 군인이 부대 구조 드러나는 셀카 찍다가 미사일 맞는 그림은 한 달 정도 생활관 현관 액자에 걸렸다. 그 군인은 관자놀이가 가려지는 신형 방탄모를 쓰고 있었다. 나는 그 신형 방탄모를 상병 때나 써볼 수 있었다.

 

그 순간만 잠깐씩의 쾌락을 맛볼 뿐이었고 나머지는 그냥 지리멸렬함을 참는 시간이었다. 생전 담가본 적 없는 분야인 보급 이론, 서로 원하는 자대를 가기 위한 눈치게임, 실습이랍시고 교육사 보급대대에서 상하차하다가 일감 주는 기간장병 눈 피해다니기... 보급대대 창고 앞에 앉아 저쪽에 있는 풋살장에서 기간장병들이 찬 공이 초록펜스를 넘어가는 걸 보았다. '저게 공군 병사의 평균 일상이겠지...' 방금 전까지 5톤 윙바디에 가득 실려 온 박스들보다 훈련병 시절 초도보급소에서 피복 나눠주며 "기재보급 특기 원하는 친구 있어요? 꿀이예요 꿀. ^^"하고 중얼거리던 병사님의 모습이 내 미래와 더 가깝기를 바랐고, 믿었다.

 

첫 면회때 엄마가 챙겨준 카누 스틱을 처음 타먹던 순간이 기억난다. 커피가 혀에 닿고 향이 입천장에 퍼지는 순간 The 1975의 Milk라는 곡이 뇌내재생되었다. 잠재적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을 탈환했다는 둥 온갖 헛소리가 그때 떠올랐고 동시에 그때를 설명하는 언어들이다. 이런 식으로 특기학교에서 찔끔찔끔 얻어낸 물질들은 사회로의 갈증을 심화시켰다. 그게 내 군생활에 어떤 영향을 미쳤건간에 동굴 속의 빛 같은 희망이었다는 점은 명백하다. 그리고 전역하고 난 지금도 그 빛의 광원은 불침번 때 한숨 쉬며 편지를 써보낸 친구가 아닌 가족이었다는 것을 추론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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