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문학

방구석에서 보낸 2020 1학기, 얻은 것과 잃은 것

머니코드17 2020. 6. 3. 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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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나는 일이병으로 개차반 같은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같이 혼나는 군생활 동기들과 BX에 가는 걸 낙으로 삼다가 밤에는 독서실에서 찌그러진 시간에 대한 보상을 받아내겠단 다짐을 적었고, 그렸다. 조만간 그 그림노트를 불에 태우거나 물가에 던져야겠지. 자꾸 남이 모르고 볼 때마다 내 감정을 수치심에 투자하고 싶지 않다. 여하튼 그림으로까지 승화될 자신이 있었던 나의 '복학 드림'은 계급이 차고 군대 안팎에서 의미 있는 체험들을 해 나가며 감소했지만 전역하는 날까지는 남아 있었다. 2020년 초 겨울은 그렇게 춥지도 않았고 나는 운전면허를 따고 팩토리오를 하며 공식석상에 등장할 날을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코로나가 터지고 학교에 갈 날은 9월로 날아가고 나는 방구석에서 사이버로 복학했다.....

 

온라인 개학 초기엔 한 학기의 반 정도만 나의 귀차니즘이 보장될거라 생각해 대체로 만족하였다. 하지만 전염병 사태가 갈수록 심각해지고 의무 기숙사비+식비가 학교 잔존인력의 인건비로 꿀꺽됨에 따라, 나는 내가 얻은 것과 잃은 것을 명확히 인지하기 시작했다.

 

1. 얻은 것

 

- 온라인 강의 들으면 하루일과 끝

온라인 수업을 하는 동안 하루 일과는 '낮에 온라인강의 듣기-밤에 놀기'로 고정이었다. 모두 다 집에서 이루어졌고 달리 방해할 일정들도 전무하다시피였다. 그런데 지금은 시험기간이라 그 안정적 일과가 위협받고 있다. 인센티브 없이 일을 한움큼 얹어주는 느낌이랄까?

 

- 일단 하기 싫으면 미루기

녹화강의 체제가 많았지만 그래도 원래 수강신청했던 시간표대로, 그날 요일의 강의는 그날 듣기를 유지해왔다. 90%만. 수업 효율이 안 나오는 전공선택이 하나 있는데 수강 제한기간도 무작정 길길래 어느샌가 목요일 강의 일정에서 빠졌다. 대비책은 강의 내려가기 전날 강의 화면 피피티 캡쳐해놓기 정도?

그밖에 시간이 안 나서 차마 못 들었던 그날 강의는 묵혀놨다가 주말로 옮겨서 듣는다.

 

- 내 기준 좋은 사이버강의 시스템

거리낌 없는 미루기가 가능했던 이유는 HelloLMS 체계에서 마감기간이 내일로 임박한 과제/미수강강의는 휴대폰 푸시알림을 보내줘서다. 내 생명줄.

이 체계의 단점이란 푸시알림을 너무 자주 보내준다는 것? 밖에서 대학공부와 관련없는 일을 보고 있는데 알림이 죽죽 뜨면 꼭 군부대에서 내가 싸놓고 나온 똥에 관한 전화가 오는 듯하다.

그밖에도 시간제 온라인시험 기능이 있어 시험방식을 웬만하면 고민할 필요가 없다. 오픈북을 가정하고 시간을 짜게 주면 하고 오픈북 하고 싶어도 못한다. 지금 컨닝을 안하겠다는 서약서까지 써가며 줌 시험을 보겠다고 선포한 강의가 하나 있는데 짜증나 죽겠다.

 

- 3대 기술 : 일렉기타, 턱걸이, 운전

셋 다 2019년엔 꿈도 못 꾸던 것들이다. 하지만 지금 나는 이 3개를 온전히 구사할 수 있다.

내가 집세도 자동차 유지비도 카드값도 막 낼 수 있는 막대한 경제적 자유를 획득해야만 가질 수 있는 아이템이 일렉기타인 줄 알았다. 그런데 고마운 엄마가 집에서 말 잘들은 대가로 선뜻 입문용 20만원짜리 일렉기타를 사주셨다. 다 부식돼가는 통기타로 평소 듣는 음악을 연주하느라 골치가 썩던 내 손가락은 하루가 다르게 날아오르고 있다. 한번 기타를 잡기 시작하고 연습이 잘되면 3시간이 훌쩍 넘어가서 이제는 그 시간이 너무 아까워 기피할 지경이다.

푸시업, 스쿼트의 맨몸운동을 한동안 해왔지만 재미없었다. 특히 푸시업은 땅바닥의 먼지를 마시기가 짜증났다. 개학도 못하고 남들 보는 시선도 남남인 동네주민 말고는 없으니 놀이터 철봉에서 풀업 1개를 연습했다. 한 달 가량 낮은 철봉에서 오스트레일리안 풀업(인버티드 로우와 비슷)과 네거티브 풀업을 했더니 어느날 갑자기 1턱걸이가 되었다. 지금은 원하는 만큼 하고 있다.

운전면허는 전역한 나를 빠르게 비열한 사회인으로 만들어주었다. 타지에서 다닌 학교를 내 운전으로 가봤을 땐 기분이 좀 좋았다. 코로나로 위험했던 벛꽃구경은 아마 차 안에서 다 하지 않았을까. 장롱면허 면제.

 

 

2. 잃은 것

 

- 인맥

군대 안에서만 쓸모있었던 인맥은 전역과 함께 다 삭제됐다 보면 되고, 새 공동체에 속하면서 주기적으로 생겨났어야 했을 인맥이 온라인수업으로 원천차단되었다. 지금껏 교류한 학교 사람이란 조별과제 인원 3명이 다다. 나머지는 가족이랑 5명 가량의 동네친구들 뿐. 충분히 가까운 이 사람들에게 돈과 시간을 거의 다 쏟아부으면 어떤 꼴이 되는지 경험해봐서 안다. 게다가 요즘 술값 터무니없이 비싸다. 일체의 교류가 2년 동안 없어왔으니 기존 학교 사람들에게도 연락할 구실이 눈 씻고 찾아봐도 없다. 다행히 연결시켜놓은 인스타 팔로워관계로 그들이 임고 공부에 시달리는 스토리나 염탐할 뿐이다. 접대비야 아껴서 좋지만 수입도 없고, 여느 야망에 찬 복학생처럼 나를 증명할 기회란 게 없는 상황이다. 해봤자 조별과제에서 다 끌고 가기.

 

- 야외활동

이번 여름에 절친 1명과 베트남 여행을 가기로 서로의 군생활때 계획을 짜놓고 그 상상으로 군생활을 버텨낸 시기가 있었다. 전역 직후에도 밤마다 베트남 여행 브이로그를 보며 잠들었다. 그리고 지금은..

 

- 도서관 폐관 핑계로 독서 안함

독서하다가 좋은 구절을 찍어 보관하는 용도로 인스타 부계정까지 만들어놨는데 잘 쉬고 있다. 집에 읽을 책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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