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에서 나는 고등학생으로 돌아가 있었다. 내가 현실의 모교가 아니라 그냥 동네에 남았다면? 이라는 설정의 평행세계였다. 꿈 패치로 그 고등학교 주변이 엄청난 깡촌이었다는 건 황당했지만... 그래도 우리 집에서 걸어서 3분인 아주 가까운 거리였다. 나는 날마다 동생과 같이 등굣길을 나서다 삼거리에서 서로 다른 방향으로 갈라지곤 했다.
나는 동네 학군에서 공부를 매우 잘 하는 속성이었다. 실제로도 그랬으니까 모교가 우등생만 뽑아놓는 명문고가 되었지. 꿈 속에서 나는 '당연히도' 학급 임원쯤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어느 날 나는 어떤 실수 하나를 해서 반 애들에게 진심으로 비난을 듣게 되었다. 방금까지도 같이 기차놀이를 하며 화기애애하게 놀던 분위기는 갑자기 싸해졌고 각자 자리에 앉아 조용히 교실 티비로 뉴스를 보며(???) 마지막 교시인 특활시간을 보냈다. 이런 데 있어봤자 내가 좋을 게 하나도 없다는 계산이 선 나는, 때마침 느껴오는 메스꺼움을 느끼고(현실에서 나는 체기가 있는 채 잠들었었다) 복도로 나섰다. 다른 반 교실을 훔쳐보니 다들 특활활동을 하러 갔는지 텅텅 비어 있었다. 우리 반 교실만 단체로 뉴스 시청을 하는 가식적인 집단행동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분위기가 싸하다 한들 그렇게까지 일사불란하게 정적일 필요가 있는 건가들?이란 생각을 하며 1층의 보건실로 내려갔다. 곧 하교 종이 치니까 그때 열리는 보건실을 미리 기다릴 생각이었다.
보건실 문은 이미 열려 있었고 보건선생이 들어오기도 전인데 약을 받으려는 아이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이내 보건선생이 들어왔고 그녀에게 달려들어 갖은 친목적 질문을 던지는 아이들을 몇 차례나 기다린 끝에 '두통, 속 안좋음'이란 증상을 보건쌤이 내미는 쪽지에 써넣을 수 있었다. 보건쌤은 그 증상 쪽지들을 기반으로 약을 제조해주었다. (아마 보건실은 내가 복무했던 부대의 의무대를 모티브로 한 것 같다) 약을 기다리는 시간도 한참이 걸렸고 그 내내 나는 보건쌤과 심각하게 친해 보이는 애들의 등쌀에 위축되어 있었다. 일단 나는 보건쌤이랑 하나도 친하지 않았고(흔한 '중년 여교사'의 인상이기는 해도 꿈속에서도 현실에서도 초면인 건 맞았다) 질문을 던지는 애들도 다 내가 학창시절 목격하고 소문으로 들어오던 '한따까리 하는 애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한따까리 중에는 일진으로서의 위압이 아니라 그 정반대, 엄청난 찐따짓으로 조롱을 한 몸에 받는 행동도 포함이었다. 보다 폭넓은 한따까리였던 것이다. 그렇게 일진~중간진~찐따 남녀가 뒤섞여 보건쌤과 별 쓰잘데기없는 질의응답을 해대는 광경을 나는 온전히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마치 동네 병원의 모든 간호사들과 의사들이 모든 환자들의 일촌 가족인 것 같았다. 그걸 한 명 한명씩 상대해주는 보건쌤도 나름 교사의 책무라고 해도 너무했다.
맨 꼴찌순서로 조제된 나의 약봉지를 받아들고 보건실을 나왔는데, 나를 위축되게 하는 존재들이 또 있었다. 복도의 계단과 코너마다 마주치는 일진들이었다. 일진들과 같이 학교생활을 하던 중학교 때 나는 공부를 잘한다는 점만 빼면 괴롭힘당하기 딱 좋은 타입이었다. 본격적으로 전교 등수에서 놀기 전까지 1~2학년 동안 샤프 등이 없어지는 건 다반사였다. 나는 특히 키가 190은 돼 보이는 꺽다리 일진이 인상 깊었다. 꿈에서 걔를 안 마주치려고 계단을 피해 올라가다가 하필 괴상한 건축 구조때문에 중간에 높은 곳에서 난간도 없이 끊긴 계단에 갇혀 버렸으면서도, 창문을 통해 걔가 빠져나가는 걸 보고 안도했던 걸 보면 무의식 중에 꺽다리를 일진 중에 가장 무서워했던 것 같다.
나는 이내 꿈에서 깼고 그런 이상한 학교와 이상한 환경과는 아무 연관도 없는 내 현실을 인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를 위축된 채로 학교 다니게 했던 일진들의 존재는 하루에 한 번도 생각하지 않은 채 적당히 껄렁거리는 나의 존재도. 나는 그 시끌시끌한 학교 환경과 가오 부리던 일진들이 나와 관련이 없었다고 믿으며 살아왔다. 그러나 그들이 내 삶에서 오래전에 없어져 주었기 때문에 내가 그 망각까지 할 수 있었다는 걸 깨달은 점이 이번 꿈을 통해 내가 예전과는 달라진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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